책읽기 20분 | 03 영락제 5
- 강의노트/책읽기 20분 2016-18
- 2017. 5. 24.
영락제 - 단죠 히로시 지음, 한종수 옮김/아이필드 |
책읽기 20분 | 영락제 5 [ 원문보기]
오늘은 《영락제》를 마지막으로 읽겠다. 책 자체가 이렇게 간단하게 끝낼만한 내용은 아닌데 정화의 남해대원정의 속사정을 살펴보기 위해서 읽기로 했기 때문에 그 부분만 읽는다. 오늘은 8,9,10장을 한다.
8장의 제목이 "쿠빌라이를 넘어서"인데 영락제나 홍무제나 원 세조 쿠빌라이를 하나의 역할 모델을 두고 있지 않았나를 논증하기 위해서 제목이 이렇게 되어있다 8장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명태조 홍무제는 "북방의 몽골족과 동남 해안의 왜구를 사정권에 넣고 전수방위라는 국방체제를 확립했다." 북방의 몽골족과 동남 해안의 왜구를 합쳐서 '북로남왜'라고 부르는데 정난의 변을 거치면서 북로쪽에서 북쪽 지역 왕들의 방위기능에 마비가 생기면서 수세에 몰리고 힘들게 지냈던 몽골족의 세력이 회복되고 다시 남왜에서는 "해안쪽의 해금과 해방 체제가 이완되면서 밀무역이 활발해지고 왜구들의 난동 조짐"이 나타났다. 북로남왜의 문제라고 하는 것은 명나라때 계속해서 닥친 문제이다. 1592년 임진왜란도 한반도의 조선과 일본과의 싸움이기는 했지만 명나라도 참전했다. 그냥 명나라가 자기네 나라가 천자국이니까 도와준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 3국전쟁이다. 명나라 초기 때부터 벌써 남왜, 왜구라고 하는 것이 일본사람들만이 아니라 중국인도 포함되었지만, 남쪽 문제가 심각한 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한가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 조선이 과연 남왜 문제를 과연 얼마나 알고 있었는가 하는 것은 조금 의문의 여지가 있다. 일단 조선의 사신들은 북쪽 지역을 거쳐서 북경으로 다녀서 남쪽 지역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다. 그것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 최근에 읽은 책인 이정철 교수가 쓴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을 보면 선조 때 동서분당에 관해 쓴 책인데 조선의 지식은 도덕적인 나라를 만들려고 애쓴 것은 사실인데 도덕국가를 만들려고 하다가 일본의 침략을 받았다. 침략을 받았다는 것 자체가 국력이 쇠약해졌다는 것도 있지만 동아시아 정세에 무감각했다는 것이 중요한 사건이다. 그에 비하면 일본은 남왜라고 하는 왜구의 본질이었기 때문에 동아시아 정세의 정확한 이해가 있었다. 그런 것들을 생각해보면 한반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요구되는 것이 국제 정세인데 특히나 정치지도자들은 그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하는 것 아닌가 한다.
214 당초 태조는 북방의 몽골족과 동남 해안의 왜구를 사정권에 넣고 전수방위라는 국방체제를 확립했다.
214 정난의 변에 따른 국내의 혼란은 단지 국토의 황폐화만 초래한 것이 아니라 국방체제 자체에도 동요를 불러오게 되었다.
215 북쪽 지역 왕들의 방위 기능에 마비가 생기면서 핍색해있던 몽골족의 세력이 회복되었다. 두 번째는, 해안쪽의 해금과 해방 체제가 이완되면서 밀무역이 활발해지고 왜구들의 난동 조짐이 나타난 것이다.
어쨌든 명나라 영락제 때부터 북로남왜라는 것이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당장은 영락제도 이 문제를 해결해야 그 위에서 화이질서라는 것도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영락제는 군사력으로 해결하면서도 동시에 조공이라는 형식에 굉장히 집착을 했다. 조공을 장려하기 위해서는 거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고 저자는 이야기 하고 있다. 이렇게 집착한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는 "주변국들과 군신관계를 맺어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를 확립하기 위해서였다." 영락제부터 시작된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확립은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자면 일종의 '핵우산'이라고 하겠는데 이 안에 조선이라는 나라도 들어가 있었던 것. 그러다가 이것이 느슨해지면서 남왜가 힘을 강성하게 가지면서부터 명나라가 만들어놓은 국제질서가 훼손되면서 침략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영락제의 화이질서에 대한 집착 또는 그것을 완성하려는 노력은 사실 조선 초부터 조선이라는 나라에 미친 영향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황제의 자리를 찬탈했다는 오명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천자의 형상을 만들려고 했던 것.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압박을 취하되 적극적으로는 조공을 재촉하는 정책을 했다는 것이 영락제의 대외정책의 기본적인 바탕이다. 그리고 북경지역에서 지냈다는 것도 중요한 경험이라고 하겠다. 그것이 본래 '대도'라고 해서 원나라의 수도였다. 거기서 저자는 원 세조 쿠빌라이를 모형으로 삼는 야심을 갖게 되지 않았나 이야기 하고 있다.
215 즉위와 동시에 남북 양쪽에서 국방체제를 고쳐 세우는 일은 영락제의 시급한 과제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218 영락제가 이렇게까지 조공에 집착한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그 하나는 주변국들과 군신관계를 맺어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를 확립하기 위해서였다.
218 영락제의 경우 여기에 더욱 특별한 사정이 더해졌다. 다른 것이 아니다. 찬탈의 오명을 불식시키기 위해 일부러라도 천자의 형상을 만들어낼 필요가 있었다.
219 군사적인 면에서도 되도록 평정을 하되 적극적으로 조공을 재촉하는 정책에 따라 명나라 중심의 화이질서가 점점 확립되어 갔다.
북쪽은 그렇다치고 남쪽은 여러 차례 얘기했던 것처럼 정화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남해의 대원정을 했다. "이 원정은 영락3년(1405)에 시작해 선덕8년(1433)까지 29년간 7차례 행해졌다." 7번째 원정은 손자인 선덕제에 해당하니까 영락제 대에는 모두 6번인데 이게 국제정치학에서는 굉장히 말이 많다. 일단 15세기 초는 이른바 '대항해시대'보다 1세기 앞선 시기이고, 또 획기적인 사업이 진행되다가 중간에 진행된 이유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논의들이 많은데 저자는 한마디로 "해외무역의 확대 발전이 목적이었다는 것."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설명이 다 되지는 않는데 무역은 부차적이었고 조공이라는 의식이 있었다고 부연설명을 한다. 다시 말해서 영락제가 원한 것은 무역으로 얻는 이익이 아니라 사방에 있는 오랑캐가 조공을 한다고 하는 영락제 때의 태평성대를 과시하려는 측면이 있었다는 것. 따라서 정화의 남해대원정은 당시 중국 사회 내부에서 요구되는 필연적인 사업이 아니라 영락제가 가지고 있었던 특수한 사정에 기댄 측면이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230 영락제가 추진했던 적극적인 대외정책 가운데 유달리 눈에 띄는 것은 환관 정화를 총사령관으로 한 남해원정이다. 실로 그 규모부터 전무무후한 이 원정은 영락3년(1405)에 시작해 선덕8년(1433)까지 29년간 7차례 행해졌다.
231 정화의 원정 사업이 위대한 점은 규모의 크기도 크기이지만 무엇보다도 그것을 행한 시기에 있다. 15세기 초는 '대항해시대'보다 1세기 앞선 시기이다.
231 이런 획기적인 대사업이 15세기 초반에 집중되었다가 그 후 갑자기 중단된 이유는 무엇일까?
232 지금은 일반적이고 대체적인 해석이 나왔는데, 한마디로 정리하면 해외무역의 확대 발전이 목적이었다는 것.
234 영락제에게는 무역은 부차적이었고 조공이라는 의식 자체에 의의가 있었다.
235 영락제가 원한 것은 무역으로 얻는 이익이 아니라 사이가 조공을 하는 '영락의 성세'였다.
235 정화의 원정은 당시 중국사회의 요청에 따른 것이 아니라 영락제의 특수한 사정에 기댄 측면이 컸다.
그래서 중화세계시스템이라는 것을 만들려고 한 것. 그 과정에서 강력하게 남쪽으로 정벌을 하려고 했던 것은 안만 지역, 오늘날의 베트남이다. 내지화했었다. 그러나 내지화를 하면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은 극히 적었기 때문에 나중에는 포기하게 된다. 저자는 한마디로 중화의 천자가 되겠다는 그의 정념에서 촉발된 사태들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락제는 북로를 정벌하기 위해서 5번에 걸쳐서 자신이 몸소 정벌을 나갔다. 그리고 5번째 나갔다가 오는 길에 65세에 죽었다.
250 무엇이 영락제를 이토록 몰아세웠을까? 오해를 무릅쓰고 감히 말하자면, 한마디로 미칠 만큼 중화의 천자가 되겠다는 그의 정념에서 촉발된 사태였을 것이다.
251 영락22년, 5차 친정의 귀로에서 영락제는 파란만장한 생을 마쳤다. 몽골의 진중에서였다.
252 친정에 대한 집념처럼 영락제가 정열을 지속적으로 불태운 사업이 하나 더 있었다. 다름 아니라 중화와 이적을 통합하기 위해서 천자의 수도를 건설하는 것, 그의 근거지인 북평(북경)으로 천도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했는데 과연 그것이 영락제 이후에도 유지되었는가. 그것은 아니라고 보는 것. 명나라 초기제체가 완성이 되었지만 "국가는 그 후에도 가능한 한 이 체제의 강화에 급급했고 애써 전제체제를 유지하려고" 했지만 "국가와 사회의 정치적 역량을 토대로 명나라 초기에 성립된 이 체제는 완성과 동시에 국가와 사회의 괴리를 필연화시키고 말았다." 또한 "해금=조공시스템도 홍무와 영락 시기를 지날 무렵부터 사회경제의 발전에 비례해 밀무역이 활발해지고 이를 견디지 못한 국가는 명나라 말기에 해금을 완화하게 된다." 즉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살아가는 현실의 모습과 국가가 추구했던 그런 질서가 서로 잘 맞지 않았던 것. 그것이 명나라 말기에 보여준 그런 모습이다. 이것을 잘 다루고 있는 책이 티모시 브룩의 《쾌락의 혼돈》이라는 책이다. 명나라 말기에 해금이 완화되고 어떻게 해서 명나라가 초기에 엄격한 전제국가가 무너져 내려갔는가를 잘 보여주는 책이다. 기회가 되면 읽어보면 좋겠다.
283 영락제는 태조가 지향했던 전제 지배를 국내외에서 철저하게 추구한 것에 불과했다. 말하자면 명나라 초기라는 시대를 '졸라맸던' 까닭에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명나라 초기 체제의 완성이었다.
283 국가는 그 후에도 가능한 한 이 체제의 강화에 급급했고 애써 전제체제를 유지하려고 했다.
283 국가와 사회의 정치적 역량을 토대로 명나라 초기에 성립된 이 체제는 완성과 동시에 국가와 사회의 괴리를 필연화시키고 말았다.
283 해금=조공시스템도 홍무와 영락 시기를 지날 무렵부터 사회경제의 발전에 비례해 밀무역이 활발해지고 이를 견디지 못한 국가는 명나라 말기에 해금을 완화하게 된다.
영락제 이후의 사건들을 살펴보면 남경에서 북경으로 수도를 옮긴 것도 심각한 문제인데 사실 장강이남 지역에 사회경제적인 발전이 굉장했고 북경지역은 그것에 못미쳤다. 그런 것들을 잘 다루고 있는 책이 나카스나 아키노리 교수가 쓴 《우아함의 탄생》이 있다. 영락제는 당대에는 성취했으나 그것이 사회가 요구하는 흐름 추세와는 거리가 멀어서 지탱하지 못했다. 사회가 요구하는 것, 사회의 구성원들이 흘러가는 방향으로 국가체제가 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럴 경우 이른바 통치국가기구로서의 국가라고 하는 것과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삶을 영위하는 생활 공간, 생활세계로서의 사회가 대립되는 것이다. 그 사이에서 생겨난 괴리가 명나라를 점차 힘겹게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명나라가 만든 화이질서도 어떻게 보면 허구적인 꿈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된다.
부수적으로 얘기해볼 후 있는 것은 화이질서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해서 굉장히 힘을 얻게 되었는가. 송나라 주자가 만들어놓은 정통론이 있다. 주자는 남송의 학자였는데 사실상 중국은 원나라 이래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기본적으로 북경이다. 남송에서 태어나고 남송에서 살았던 주자가 자기나라를 정통이라고 하고 싶었던 것. 그래서 북송에서 사마광이 지었던 자치통감을 주자가 다시 축약해서 자치통감강목을 지었다. 여기에서 주자는 남송을 정통이라고 얘기했다. 명대에 이르러서는 주자가 만들어놓은 정통론과 화이론이 겹쳐져서 굉장히 넓은 의미에서의 화이질서의 이론적인 토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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