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 20분 | 03 옥스퍼드 중국사 3
- 강의노트/책읽기 20분 2016-18
- 2016. 6. 12.
[책읽기 20분] 옥스퍼드 중국사 - 5
Posted on 2016년 6월 6일
폴 로프(지음), <<옥스퍼드 중국사 수업>>, 유유출판사, 2016.
원제: Paul Ropp, China in World History.
5장 축소된 제국과 유목민족 도전자들: 송 왕조(960-1279)와 원 왕조(1279-1368)
송에서 주목할 점들
1) 중앙집권적 관료제 국가로 변화한 것: 세습귀족이 관료가 되던 시대에서 지식인층이 과거시험을 통해 관료로 진출하는 시대로 변화
2) 경제혁명
- 농업생산성이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렸다. 지역간 상업과 국제교역이 발전하면 화폐경제로 이행
- 철제련기술의 진보: "당시 세계 최고 규모로 철제련업을 육성"
- 국제교역
- "중국 비단, 칠기, 자기는 송나라 때 기술적으로 가장 높은 수준에 도달"
원이 성취한 것: "한 나라와 당 나라보다 더 넓고 북송보다 훨씬 더 광활한 제국은 창조", "한족이 이전에 결코 해내지 못한 방식으로 각 민족을 하나의 거대한 제국으로 융합"
6장 근대 초기의 중국: 명 왕조(1368-1644)와 청 왕조 전반기(1644-1800)
명에서 주목할 점들
1) 정화의 남해대원정(1405년): 새로 창업한 명 왕조의 권위를 대외적으로 과시하여 더 많은 나라를 조공국으로 회유하려는 목적으로 이루어졌다. "경제적 이득은 거의 없었다."
2) 두번째 상업혁명
- 명나라 말기와 청나라 전 시기에 걸쳐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
- 면화생산 급증
- 은이 주요 교환수단으로 등장, "일부 경제사가들은 1500-1800년에 신대륙에서 생산된 은의 사분의 삼 정도가 중국으로 흘러 들어갔을 것으로 추산한다."
- 사회문화적 변화: 많은 사람들이 글을 알게 되었고, 16-17세기 지식인들은 굳이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공직생활을 하지 않아도 사회 전반의 부와 번영이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는 새로운 출구를 마련해주었다. 여기에는 인쇄출판이라는 정보기술(Information Technology)의 발전도 큰 역할을 하였다.
오카다 히데히로의 《세계사의 탄생》
이 책은 9개의 챕터로 이루어져 있으나 7,8,9장은 읽지 않고 지나간다. 1장에서 6장까지가 250페이지 정도 되고, 7장에서 9장까지 140 페이지 정도된다. 연대를 보면 7장이 1800년 이후로, 챕터 제목이 "청 제국의 쇠퇴와 몰락, 그 후(1800–1920)"이다. 다시 말해서 현재부터 지난 200년 정도 역사를 다루고 있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얘기다. 중국의 역사가 얼마나 긴데 고작 200년을 다루기 위해서 챕터 3장을 할애 했다. 거의 모든 역사가들은 현대사가 중요하다는 것에 대해서 합의에 이르러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이 부분을 다루지 않는 이유는 1800년 이후의 역사는 그만큼 중요한 만큼 다루어야 할 내용이 많은데 그에 대한 풍부한 식견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은 5-6장을 하고 이 책은 마무리를 하겠다.
5장이 "축소된 제국과 유목 민족 도전자들: 송 왕조(960–1279)와 원 왕조(1279–1368)"이고, 6장이 "근대 초기의 중국: 명 왕조(1368–1644)와 청 왕조 전반기(1644–1800)"이다. 그리고 다음 주에는 '책읽기20분'을 가지고 공부를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은지 물어오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책읽기20분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다루는 법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송나라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끝이 없다. 그런데 5장에서 주목할 점에 대해 두 가지 정도를 보겠다. 첫째는 중앙집권적 관료제 국가로 변화한 것. 송이라는 나라가 이전시기 당나라와의 차이가 무엇인가가 중요하다. 중앙집권적인 국가는 예전부터 있었지만 관료제 국가는 처음이다. 그 다음에 문화적 추이에서의 변화가 무엇인가를 보겠다. 특히 신유가, 주자학이라고 하면 주자를 지나치게 높이 평가해주는 면이 있고, 송명이학이 적합한 표현이 아닌가 한다. 어느 나라, 어느 시기에 되었는가를 따져 묻는다면 송나라와 명나라 시기이고, 학문의 궁극적인 원리를 따져서 말한다면 이학이니 송명이학이 가장 적합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서양에서는 신 유가라고 하는데 이 신 유가의 등장에 따른 문화적 추이는 무엇인가, 여기에 문화적 변화를 이끌어낸 결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낸 요소는 바로 송나라의 경제혁명에 있다.
중앙집권적 관료제 국가로의 변화, 신 유가의 변화, 그리고 그런 것들을 가능하게 했던 송나라의 경제혁명 세가지를 집중적으로 보려고 한다. 원나라에 대해서는 중국의 역사에 분명히 포함되는 것 사실이지만 이 부분은 몽골제국사의 하나로 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서 거론하지 않고 지나가겠다. 몽골제국사는 또 다른 본격적인 의미에서의 세계사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오카다 히데히로의 《세계사의 탄생》 이라는 책에서 보면 몽골제국이야말로 본격적인 의미에서의 세계사가 시작되는 곳이라고 얘기한다.
189 조광윤은 역사 기록을 통해 송 태조로 알려진 인물이다. 송 태도는 일찍이 전례가 없는 대단히 중앙 집권적인 국가를 창조했기 때문에 중국사에서 중추적 역할을 한 황제라고 볼 수 있다.
191 송나라의 중국은 황제가 유가 경전을 깊이 공부한 문인 관료들의 간언과 보좌를 바탕으로 통치하는 중앙 집권적 관료제 국가의 건설이라는 유가적 이상을 거의 실현할 수 있었는데, 이는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송이라고 부르는 나라는 북송과 남송 시대로 구분한다. 북송은 960-1127년, 1127년 정강의 변. 휘종과 그의 아들이 금나라에 체포되고 그런 사건들에 의해 1127년에 망하고 남송을 건국하게 된다. 남송은 1127-1279년이다. 우리가 잘 아는 주자의 생몰연대는 1130-1200년이다. 그러니까 남송이 건국된지 얼마 안된 시기에 태어나서 자리를 잡아가는 시기까지 살았다.
북송은 960년에 건국되었는데 중국 역사상 가장 군사적으로 허약한 나라였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요나라의 침략을 받아서 전연의 맹이라는 조약을 맺었다. 흔히 북송시대는 정강의 변까지를 북송시대라 한다. 전연의 맹을 1004년을 맺었는데 60쯤 지났을 때 요나라에게 곡물을 바치고 하다보니 나라가 개판으로 되었다. 이때 바로 세계사책에서 많이 나오는 왕안석의 신법이 나온다. 현실의 정치적·경제적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실용주의를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고, 이 것에 대립해서 후일의 주자학, 신 유가학파로 발전하는 도덕적 이상주의가 있었다.
192 요나라는 북중국의 한족 사회를 끊임없이 위협했는데, 심지어 979년에는 송 황제에게 직접 부상을 입히기도 했다. 1004년 요나라가 황허 강 유역의 상당 지역을 차지하자 송나라와 요나라 조정은 국가 간 대등한 협정의 형식으로 조약을 맺었다.
197 논쟁의 중심에는 괴팍한 이상주의자 왕안석 王安石(1021-1086)이 있었다. 그는 국가가 백성에게 봉사해야 한다는 고전적인 유가의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서는 급진적인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202 금나라는 송나라의 지원으로 요나라를 격퇴했지만, 곧이어 1127년 송나라의 수도 카이펑으로 진격했다. 휘종과 그의 아들은 금나라에 체포되어 감금된 채 최후를 맞이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송의 관료집단이 변화했다는 것. 당나라까지만 해도 귀족이 관료가 되었으니 관료도 세습되었는데 송에서는 지식인층이 과거시험을 통해 관료로 진출하는 시대로 변화했다는 것이다. 과거시험의 과목이 바로 고전교육. 폭넓은 고전교육이 요구되었다는 것. 간단히 말하면 고시시험에서 관료가 되는 것이 송에서 시작되었다. 이것은 정치체제의 역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사건. 고전 교육을 하려면 책이 있어야 하는데 송에서 출판 인쇄가 굉장히 발전했다는 것도 유념해야 할 지점이다.
경제혁명은 우선 농업생산성이 가파른 상승곡선을 탔고, 돈으로 바꿀 수 있는 작물들을 많이 재배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역간 상업이나 국제교역이 많이 발전하게 된다, 그러니까 농업생산성에서 시작해서 국제교역까지 이어져 가는 과정에서 화폐경제가 발전했다는 것이 경제혁명의 첫째 부분이고, 둘째 부분은 철제련기술이 발전해서 저자에 따르면 당시 세계 최고 규모로 철제련이 발전했고, 국제 교역에 있어서는 아라비아의 무슬림 상인들이 많이 드나들었고, 중요한 점으로는 중국이 발명한 나침반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중국 비단칠기는 송나라때 기술적으로 가장 높은 수준에 도달했다.
206 이처럼 문화적 추이가 변화한 한 가지 이유는 송나라 때 일어난 중국 사회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 당나라 때는 강력한 귀족층이 관료의 지위를 이어받는 경우가 많았지만, 송나라 때에는 지식인층이 과거 시험을 통해 조정 관료로 진출하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206 당나라 때 발명된 인쇄술이 송나라에 접어들어 더욱 확산되었는데, 이는 더 많은 가문에 더 많은 책이 필요해졌으며 과거 시험 합격과 관료 임용을 위한 경쟁이 더욱 치열해졌음을 의미했다.
207 가장 영향력 있는 신유가 학자는 주희(1130-1200)였다. 그는 수많은 신유가 사상가들의 업적을 하나의 위대한 철학적 체계로 종합했다. 그는 주석서를 집필하고 초기 유가 경전들을 모두 편집했다. 그의 주석은 1905년 과거 시험이 폐지될 때까지 유일한 정답으로 인정되었다.
213 송 조정은 당시 세계 최고 규모로 철 제련업을 육성했고, 그 결과 1078년 12만 5,000톤(이후의 800년 동안 유럽이 미치지 못한 생산량)의 철을 생산했다.
214 농업이 더욱 전문화되고 국제교역이 팽창함에 따라, 송 조정은 건국 초기에 한 도시에서 일부 상인들에게 종이로 된 현금 예금 증명서 발행을 허가했다.
218 송나라의 번영은 국제 교역을 촉진했다. 특히 동남 해안을 따라 교역이 발달했는데, 아라비아 무슬림 상인들은 방수 칸막이가 설치된 거대한 중국산 선박을 타고 다녔고, 중국, 동남아시아, 인도양 사이를 오가는 장거리 교역을 원활히 하기 위해 중국이 발명한 나침반을 사용했다.
그 다음 송을 멸망시키고 등장한 몽골, 원나라는 한나라나 당나라보다 더 넓고 북송보다도 더 광활한 제국을 창조했다. 그리고 한족이 결코 이전에는 해내지 못한 방식으로 각 민족을 거대한 제국으로 융합했다. 이 방식은 나중에 청나라 때 드러난다.
5장은 송나라에서 주로 생겨났던 업적, 특히 변화된 부분들인 농업생산성, 철 제련 기술, 국제 교역, 비단칠기 이렇게 4가지를 유념할 필요가 있다. 지식인층이 과거시험을 통해 관료로 진출한 사건도 중요한 부분이다.
제 6장 근대 초기의 중국: 명 왕조(1368–1644)와 청 왕조 전반기(1644–1800)를 보자. 청 왕조의 전반기가 1644-1800까지 약 140년 정도를 전반기라고 하는데 1800년으로 끊은 것은 적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800년부터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본격적인 의미에서 근대로 간주하면 적절하다. 세계사를 볼 때 근대를 애기할 때는 기준연도가 되는 것이다.
7장의 첫 문단에 보면 "청나라가 쇠퇴할 무렵 유럽에서는 산업 혁명이 진행되었다. 호전적인 서유럽 국가들은 무역과 전쟁이라는 두 가지 사업을 통해 세계를 지배하려 했다. 청나라가 기울기 시작한 때가 유럽에서 이 두 가지 변화가 일어난 시점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은 역사의 잔혹한 우연이었다."라고 말한다. 역사에 대해서 잔혹하다거나 위대한 이런 가치 평가는 어울리지 않다. 18세기가 지나면서 무역과 전쟁이라는 두 가지 사업이 중국에서도 늘 해오던 것인데 청나라에서는 잘 안되던 것이 유럽에서 시작했다
279 청나라가 쇠퇴할 무렵 유럽에서는 산업 혁명이 진행되었다. 호전적인 서유럽 국가들은 무역과 전쟁이라는 두 가지 사업을 통해 세계를 지배하려 했다. 청나라가 기울기 시작한 때가 유럽에서 이 두 가지 변화가 일어난 시점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은 역사의 잔혹한 우연이었다.
명나라를 보면 두 가지 점을 유념해야 한다. 정화의 남해 대원정과 두 번째 산업혁명. 중국인들이 해외로 이주하기 시작했고 문화적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 그 다음에 청왕조 전반기는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와 같은 이들의 업적과 통치방식 정도를 들 수 있다.
명나라 영락제 때 남해 대원정의 목적은 단순히 새로 창업한 명 왕조의 권위를 대외적으로 과시하여 더 많은 나라를 조공국으로 회유하려는 목적으로 경제적 이득은 거의 없었다. 이들이 해군력을 이렇게 사용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200년 정도 지나면 유럽에서는 해군력을 침략에 활용한다. 뭐가 더 잘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명나라에서 해군력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주목할 만하다.
244 영락제가 착수한 것 가운데 가장 독특한 사업은 정화郑和의 원정이었다. 정화는 무슬림 출신의 환관 제독으로, 세계에서 그 동안 유례가 없었던 그리고 이후 500년 동안에도 유례가 없었던 대규모 선단을 조직했다.
245 원정의 주요한 목적은 새로 창업한 명 왕조의 권위를 대외적으로 과시하여 더 많은 나라를 조공국으로 회유함으로써 명 조정에 조공을 바치게 하는 것이었다.
245 정화 함대 파견의 주요한 목적이 명나라의 권위와 위엄을 드러내는 것이었기 때문에 경제적 이득은 거의 없었다.
247 만약 유럽인이 2-3세기 뒤에 사람과 영토를 정복하고 국제교역을 장악하기 위해 사용했던 것처럼, 15세기의 중국인이 자신의 우수한 해군력을 같은 방식으로 활용했다면 이후 근대 세계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하고 우리는 단지 추측만 해 볼 따름이다.
중요한 것은 두 번째 상업혁명. 명나라 말기와 청나라 전 시기에 걸쳐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가 있었고, 면화생산이 급증했다. 그 다음에 은이 주요 교환수단으로 등장했다. 그래서 "일부 경제사가들은 1500-1800년에 신대륙에서 생산된 은의 사분의 삼 정도가 중국으로 흘러 들어갔을 것으로 추산한다." 그만큼 은을 주고 사갈만한 물건이 중국에 많았다는 것. 그때도 중국은 세계의 공장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상업이 발전하면서 16,17세기 중국인들은 많은 사람들이 글을 알게 되었고, 굳이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공직생활을 하지 않아도 사회 전반의 부와 번영이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는 새로운 출구를 마련해주었다.
249 농민들은 과일, 채소, 쌀, 밀, 설탕, 면화, 차, 담배와 같은 작물을 상품 작물로 특화시켰다. 은은 주요 교환수단이 되었다. 엄청나게 많은 양의 은이 일본에서 중국으로 유입되었고, 1570년대 이후에는 에스파냐인이 페루와 멕시코에서 생산한 은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251 명나라 말기에 중국은 지구상에서 가장 번영하는 나라였던 것으로 보인다. 일부 경제사가들은 1500-1800년에 신대륙에서 생산된 은의 사분의 삼 정도가 중국으로 흘러 들어갔을 것으로 추산한다.
251 학자들은 유가 사상에서 공적 활동을 중시하는 측면을 선호했지만, 관료가 되는 유일한 방법은 과거 시험에 합격하는 것뿐이었다.
252 주희와 견줄 만한 유일한 후대의 유가 사상가로는 명나라의 학자 관료이자 선견지명이 있는 왕양명王陽明을 들 수 있다.
인쇄업이 호황에 이르렀다. 공직생활을 하지 않아도 과거를 보지 않아도 지식인으로 살아갈 수 있었고, 그걸 뒷받침하는 사적인 부의 통로들이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퍼뜨릴 수 있는 출판업이 발전했다. 중국의 전통은 관리가 스승이 되고, 스승이 관리가 되는 것이었는데 그것을 벗어날 수 있는 시기가 이미 명나라때 만들어졌다는 것. 사적영역의 지식들이 사회를 이끌어가는 시기가 되었다. 경제적으로 변화했다는 것. 여기에 출판업은 정보기술의 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다.
254 명나라 때는 출판업이 전례 없는 호황을 누렸다. 도시를 소개하는 책자 과거 시험 수험서, 남녀를 위한 설교 서적, 달력, 어려운 문어체가 아니라 구어체 중국어로 된 소설, 유행가, 시 그리고 상연뿐 아니라 읽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 희곡 작품도 출간되었다.
사적인 부분에서 부가 쌓이고 그것에 근거해서 지식을 축적할 수 있게 되고 창조성을 발산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고 그러면 국가의 부를 땅겨 올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손과 같은 장치들을 마련해야 하는데 여전히 국가를 통해서 부를 창출해 내야겠다는 생각, 그렇게 해서 그 부를 공인 해야겠다는 생각, 이런 생각이 있었던 것이 사실은 명나라에 이어지는 청나라 때까지의 사태이다. 그래서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청나라 중국 황제들을 이상적인 군주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실 청나라 군주들은 건륭제 때 사고전서라는 엄청난 학문적인 치적도 쌓았다. 국가사업이었던 것. 물론 그들은 만주족의 황제들이니 한족을 지배하기 위해 이데올로기를 장악하는 노력을 했어야만 했는데 계속해서 관변으로 흘러갔다. 중국이라는 나라는 이미 관변으로는 안된다는 것을 1800년때 그런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본다.
267 동시대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와 비교되기도 하는 강희제는 중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황제로 손꼽힌다. 그는 1722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60년 동안 재위했는데, 이 재위 기간은 중국의 역대 황제 가운데 최고 기록이다.
271 건륭제는 또한 할아버지처럼 예술, 철학, 시 등 중국 문화의 후원자 역할을 했다. 그는 매우 열성적인 예술품 수집가였으며, 중국 역사상 가장 큰 도서관을 만들었다. 『사고전서』四庫全書는 그때까지 중국에서 출간된 중요 문헌을 집대성한 것이다.
지금까지 서론부터 시작해서 6장까지 총괄을 해보면 중국에서 가장 지속적인 것은 지리환경. 바다를 통한 교역이 활발했으나 그것에 집중하지는 않았고, 18세기 이후에는 오히려 교역에 집중하지 않았다는 것이 강력한 쇠퇴의 원인이 된다. 땅이 넓어도 소용이 없게 되어버리는 것. 그 다음에 오늘날 중국을 둘러싸고 바다에서 벌어지는 분쟁까지 연결해서 본다면 중국사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들은 1800년대 이후는 바다의 문제가 아닌가 한다. 그리고 농업국가라는 것에서 중국은 중요한 경제적 발전을 이룩했으나 오늘날에는 그것이 중요한 요인은 아니다. 중국에서 지속적인 것으로 알려진 것 하나가 조상숭배와 가부장제인데 현재 어떠한지는 짐작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많은 사건들을 보건대 현재 가부장제는 무너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낙관적 현실주의가 지속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현실주의는 있는 것 같은데 이상주의는 부족한게 아닌가 한다. 중국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제국으로 발돋움하려면 정치경제적 힘보다 더 중요한 것, 즉 문화적 포용력을 갖고 있어야 하는데 과연 중국이 그런 문화적 포용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미지수이다. 로마 초대황제인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문턱을 넘을지는 미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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