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고전강의 | 09 모비딕 2


모비 딕 - 10점
허먼 멜빌 지음, 김석희 옮김/작가정신


강유원, '인문고전강의' 

일시: 2013년 2월7일 – 12월 5일, 매주 목요일 오후 7시30분 – 9시30분(총 40주)

장소: 과천시정보과학도서관


* 강의 목차

20131031 34강 모비딕

20131107 35강 모비딕

20131114 36강 모비딕


+ 강의에 사용된 교재가 아닌 열린책들에서 출간된 모비딕을 읽고 강의를 들으니 페이지와 번역이 다르다. 페이지는 맞춰서 따라가면 되지만 중요한 부분에서 번역이 다르게 되어있는 부분이 군데군데 보인다. 강의 정리 후 교재에 사용된 책을 구입해서 다시 읽을 예정이다.


20131107 35강 모비딕

문학고전작품들은 연대가 앞에 나온 것부터 읽는 것이 공부하는데 도움이 된다. 순서를 잘 정해야 한다.


188 (96장) 금빛 찬란한 아름다운 태양만이 유일한 진짜 등불이며, 나머지는 전부 거짓말쟁이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 부분이다.


모비딕을 읽는 가장 참조해야 하는 핵심적인 텍스트는 <성서>의 욥기.  


이슈마엘이 사건을 겪으면서 동시에 서술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에필로그에 욥기가 인용되어 있는 부분으로 알 수 있다.

393 저만 가까스로 살아남아서 이렇게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욥기> 1장 13-19절(공동번역)

여기서 저는 욥이 아니라 하인이다. 이슈마엘도 고난에서 살아남아 보고하는 자. 이슈마멜은 욥이 아니다.


욥, 이슈마엘, 에이해브 이렇게 3명이 모비딕의 주인공. 

욥기 맨마지막 문장을 보면 42장 17절 욥은 이렇게 수를 다 누리고 늙어서 세상을 떠났다. 

고난을 받기도 하기도 하다가 나중에 구원을 받는다. 하나님에게 고난을 받는 욥, 하나님에게 신세한탄을 하는 욥,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하니님에게 칭찬 받아서 모든 것을 돌려받는 욥.  한 명의 욥에 3개 아이덴티티가 결합되어서 1개의 아이덴티티를 형성한다.


고난을 당하기 전에 비반성적 삶을 사는 욥이 있고, 고난을 당하는 욥이 있고, 고난을 당하면서도 신에 대한 믿음을 져버리지 않은 욥이 있다.  에이해브는 신의 섭리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고 쳐들어간다. 신을 저주하는 것. 욥의 한 측면인 신에게 거역하는 욥이 된다. 신에게 대립하는 욥.


128 (16장) 에이해브 선장은 뭣 때문에? 걱정할 것 없네 자네는 배에 타기로 됐으니까.

                    에이해브 선장은 오만한고 불경하다 못해 신 같은 사람이지.

다른 사람이 에이해브에 대해 말하는 부분으로 신을 닮은 사람이라고 표현한 것은 호메로스적인 것.


128 (16장) 그는 빌대드 선장이 아니니까. 천만에, 펠레그 선장도 아니야. 그는 에이해브일세.

 신에 맞서 서 있는 욥이 바로 에이해브.  이 단계를 거쳐간 다음에 신과 화해하고 신에게 복종하는 욥이 있다. 그러다가 참회하는 욥이 지점이 나온다. 첫 번째 단계 욥과 세 번째 단계의 욥은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잘듣는 욥인데 그 중간에 파토스를 겪었다는 것이 달라져서 질적으로 고양된 상태. 이 구조는 서구문학에서 굉장히 중요하다. 이미 우리는 <오뒷세이아>에서 배웠다. 반면 동아시아 세계에서는 고생을 한 사람이 신분이 업그레이된다. 여기서 욥은 여전히 욥이고, 오뒷세우스은 오뒷세우스이다. 


이슈마엘은 어디에 속하여 있나. 욥은 욥인데 어중간한 욥. 욥은 신의 섭리를 깨달은 사람. 이슈마엘은 이러한 노선을 따라가긴 하는데 신의 섭리를 따라가지 못한 욥이다.


393 (에필로그) 배화교도가 사라진 후, 운명의 여신들에 의해 에이해브의 빈 노잡이 자리를 차지한 건 바로 나였다.

운명의 여신이라고 하는 것은 아직 신의 섭리가 아니다.


393 (에필로그) 교묘한 탄력으로 배에서 떨어져 나온 관 같은 구명부표가 엄청난 부력 덕분에 힘차게 솟구쳐 공중으로 날아올랐다가 떨어져서 내 옆으로 떠내려 왔다.

우연히 관이 떨어진 것처럼 얘기하지만 사실 이 부분이 신의 섭리.  그런데 이슈마엘은 신의 섭리임을 모르고 있다. 그저 운명의 여신, 즉 우연히 살아남았다 생각한다. 


신의 섭리 임을 확인할 수 있는 하나의 단어가 에필로그에 있다. 레이첼rachel. <성서>의 라헬. 라헬은 요셉의 어머니이자 야곱의 부인. 야곱은 이삭의 아들이며 아브라함의 손자. 


394 (에필로그) 그 배는 항로를 벗어나 돌아다니던 레이철호였는데, 잃어버린 아이들을 찾기 위해 왔던 길을 더듬어 올라가다가 엉뚱한 고아를 발견한 셈이다.

고난을 겪었음에도 이슈마엘은 신의 섭리에 의해서 살게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퀴퀘그의 관에 의해 살아남았다고 생각한다. 


<모디딕>은 해피엔딩인가? 드라마는 비극이다. 그의 목숨이 살았다해도 어떤 힘에 의해서 살아남았는지 모르는 한은, 즉 앎이 없는 것은 비극이다. 그리고 이런 비극을 우리에게 남겨준 허만 멜빌. 독자가 비극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멜빌에게는 희극.


에이해브는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어떻게 하면 일이 가는 것도 알고 있지만 2단계에서 자기 자신을 끝장내버린다. 선행하는 위대한 비극작품들의 비극적 영웅들에 대한 정보와 패턴을 알고있어야 에이해브가 이해된다. 에이해브는 정형적인 비극드라마의 주인공.


297 (119장) 그 맥박을 느끼고, 내 맥박을 거기에 대고 싶다. 불에 맞댄 피! 어서.

297 (119장) 그러더니 고리 끝부분을 왼손에 단단히 쥐고 돌아서서 발을 배화교도에게 얹고는 고개를 들어 시선을 위에 고정한 채 오른손을 높이 뻗으며 허공에서 타오르는 세 불꽃을 향해 꼿꼿이 섰다.


이런 부분을 읽을 때 에이해브가 어떤 행위를 하는지 봐야한다. 신을 저주하는 부분. 맞서 싸우려는 부분.


297 (119장) 오오, 밝은 불의 밝은 정령이여, 페르시아인처럼 나는 한때 이 바다에서 그대를 숭배했으나 예배를 드리던 중에 그대에게서 크게 화상을 입어 지금까지도 흉터가 남아 있다. 나는 이제 그대를 아노라, 그대 밝은 정령이여. 그리고 이제 저항이야말로 그대를 올바르게 숭배하는 방법이라는 걸 아노라. 


299 (119장) 나도 그대와 함께 도약하고, 그대와 함께 불타며, 기꺼이 그대와 하나가 되리라. 저항의 몸짓으로 그대를 경배하노니!


텍스트에 핵심적인 줄거리가 2개 있는데 이스마엘과 에이해브의 줄거리가 겹쳤다 따로갔다 한다.

이슈마엘의 path는 에필로그에 나와 있는 것처럼 운명의 여신이 돌리는 우연의 수레바퀴를 따라가는 것. 비자각적 삶.  이슈마엘은 레이첼호에 의해 구원을 받기는 하지만 fortuna의 길을 가는 것. 그런데 에이해브는 tragic hero의 길을 걸어가게 된다. 그리고 이 밑바닥을 관통하는 것은 결국에는 에이해브는 신의 섭리를 거역한 것이고, 이슈마엘은 신의 섭리를 알지 못한 것. 욥의 길은 섭리에 따르는 것. 이 3가지 길이 나타난다.


이 구도를 가지고서 다시 목차를 보자


첫번째 파트가 1-22장. 

1장 [어렴풋이 보이는 것들]은 이 소설 전체의 프롤로그. 전체의 주제와 등장인물이 다 나타나 있다. 2-22장까지가 이슈마엘 이야기. 3, 9, 16장에 별표. 16장 [배]는 에이해브가 에 대한 이야기로 직접 등장하지는 않지만 '신앙심은 없으나 신을 닮은'. 28장 [에이해브]에 에이해브가 실물로 등장. 가만히 생각해보면 9장 [설교]는 <성서> 중 요나에 대한 설교. 16장 [배]에 피쿼드호에 대한 설명과 에이해드에 대한 소문이 나온다.


두번째 파트가 23-45장.

23장 [바람에 닿는 해안]에 별표. 무대가 바다로 바뀌었다. 단순히 바다에 나갔다는 것이 아니라 본격적인 파토스의 시작. 26-27 [기사와 종자]에서 등장 인물들에 대해 나오는데 이 사람들이 이 파토스의 구성요소들이기도 하고, 동시에 바다도 세계고 바다 위에 떠있는 피쿼드호도 세계, 대우주-소우주. 피쿼스호에 타고있는 선원들에 설명하는 것은 우주의 구성요소에 대해 설명하는 것.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진 선원들의 등장. 그리고 나서 28장에 에이해브의 등장.

그 다음이 41장 모비딕. 이슈마엘에게 모비딕은 무엇이고 에이해브에게는 무엇인가가 바로 42장 [고래의 흰색]. 

23장 [바람에 닿는 해안]에서는 이슈마엘과 에이해브가 서로 대비되어서 나온다. 그리고 36장 [뒤쪽 갑판]에서는 이슈마엘이 모비딕과 에이해브에 대해 얘기한다.  두번째 파트는 에이해브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모비딕 이야기 이면서 동시에 이스마엘과 에이해브가 서로 교직되는 이야기하면서 또 에이해브와 모비딕이 교직되는 이야기.


세번째 파트가 46-72장. 

멜빌의 박학다식을 자랑하기 위한 부분. 무엇이 일상을 구상하는가에 대한 얘기가 있다.


네번째 파트가 73-105장.

고래학. 고래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로 아주 중요한 부분. 바다의 일상적 삶과 고래에 관한 이야기가 연결되는 부분이 바로 70장 [스핑크스]. 스핑크스 부분을 유념할 것.

네번째 파트는 1차적으로는 고래에 관한 일차적 서술로 보인다. 그런데 고래라는 것에 대해 아주 자세히 얘기한다. 고래에 대한 탐구를 하면서 진리탐구의 발견을 보여주는 것. 

그래서 96장 [정유화덕]에서 '금빛 찬란한 태양...', 즉 동굴의 비유가 나오는데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는 진리탐구의 방법을 다루는 것이다.  네번째 파트 96,99장 [스페인 금화]가 중요한 부분이다.


그 다음에 마지막 부분이 에필로그 전까지. 

114장 [황금빛 바다]에서 운명의 여신과 그것에 도전하는 에이해브. 여기서부터 135장 [추적 - 셋째 날]까지 에이해브의 고난을 보여준다. 

<안티고네>를 보면 비극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주인공이 비극적 결말에 이르기 직전에 코로스와 등장인물이 다같이 춤추면서 부르는 노래가 나온다. 감정을 끌어올리 다음에 주인공을 파멸에 넣어버리는 부분인데 그게 바로 여기서는 132장 [교향곡]


1장은 텍스트 전체의 프롤로그. 다시말해서 단테 신곡이 지옥 34편, 연옥 33편, 천국 33편인데 지옥편 제1장이 신곡 전체의 프롤로그에 해당한다. 모비딕도 마찬가지. 

 

이 문학의 위대함에 들어가기 위한 첫번째 노력은 무엇인가. 바로 모든 135개 챕터의 영어 문장을 보고 다 사전을 들고 뜻을 찾아봐야 한다. 그 문장의 뜻이 여러가지가 있으면 과연 그 챕터안에 나오는가를 봐야한다. 그렇게 해서 위대한 문학을 공부한 사람만이 위대한 문학을 흉내낸 위대한 문장을 쓸 수 있다.



제 1장을 보자.

제목이 영어판으로는 Loomings.

looming의 사전적 뜻은 어렴풋한. 베틀. 직조기. 우리 눈에만 어렴풋하게 보이는 것이고, 이 드라마의 실질적인 밑에 깔려있는 주인공은 욥이고 욥은 providence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 이슈마엘 눈에는 어렴풋하게 보이지만 사실은 providence를 직조하고있는 것.


28 (1장) 카노는 철학적인 미사여구를 들먹이며 제 칼에 목을 던졌지만, 나는 조용히 배에 오른다.

배라고 하는 메타포가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밑줄. 배타러 간다는 건 바다가 세계고, 파토스를 겪으러 나간다. 배, 선원, 바다.


29 (1장)하지만 보라! 더 많은 무리가 바다를 향해 다가온다. 뛰어들기라도 할 것처럼 곧장 걸어온다. 희한하기도 하지! 저들은 땅의 끄트머리에 서지 않고는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육지와 바다의 대비를 계속 드러내 보인다. 그러다가 23장에서 정말로 바다와 육지와 만나서 바다로 들어가는 부분이 나온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파토스가 시작되는 부분이라고 말한 것.


29 (1장) 모두가 알다시피 명상과 물은 영원히 하나로 맺어져 있다.

명상이라고 번역하면 안된다. medication 성찰. 

바다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이슈마일이 계속 코멘트를 하다가 결론을 내린 것이 이 문장. 즉 바다가 진리의 원천이다. 그리고 나서 다음에 긴 문단이 나온다. 물에 대한 찬미가 이어지고 있는 것. 문단이 상당히 긴데 제임스 미치너의 문학론을 보면 '위대한 작가들은 첫페이지에서 독자를 떨어뜨린다.'는 말이 있다.


30 (1장) 샘에 비친 영상을 잡을 수 없어 괴로워하다 물에 빠져 죽은 나르키소스의 이야기는 더 의미심장하다. 그런데 바로 그 영상을 우리는 모든 강과 바다에서 본다. 그건 결코 움켜잡을 수 없는 인생의 환영이며, 모든 것의 열쇠다.

왜 바다 이야기를 하고 고래 이야기를 하는가. 우리는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다 찾아볼 수는 없다. 그래서 위대한 문학을 읽고, 위대한 역사를 읽고, 위대한 철학을 읽는다. 하찮은 문학을 읽으면서 인생을 낭비하기에는 너무 짧다. <오뒷세이아>, <모비딕>을 10번 읽는게 낫지 견문을 넓힐 필요가 없다.


잠시 16장으로 가서 배에 관한 설명을 보자

114 (16장) 잘은 모르지만 다들 살면서 별난 배들을 많이 봤을 것이다.바닥이 네모진 돛배, 산처럼 커다란 일본 범선, 버터 상자 같은 갤리선 등등. 하지만 단언컨대 피쿼드호처럼 진귀한 배는 본 적이 없늘 터다. 배는 구식이고 작은 편이었으며, 어딘가 갈고리 발이 달린 오래된 가구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오랜 세월 사대양의 태풍과 잔잔함을 두루 거치며 풍상을 겪은 낡은 선체의 빛깔은 흡사 이집트와 시베리아의 전투에 모두 참전한 프랑스 척탄병처럼 검게 그을었다. 고풍스러운 뱃머리는 턱수염이 난 것 같았다. 원래 있던 돛대가 강품에 꺾여 바닷속으로 사라지는 바람에 일본 해안 어딘가에서 배어다 세웠다는 돛대들은 퀄른 삼성왕의 등뼈처럼 꼿꼿했다.

피쿼드호는 모든 배의 표상. 자세히 보면 전세계가 다 망라되고 있다. 피쿼드가 전 세계인 것.


다시 1장을 보자.

30 (1장) 승객의 자격으로 바다에 간다는 뜻이 아니다.

승객은 방관하는 자. 구경꾼.

31 (1장) 내가 바다에 나갈 땐 일개 선원이 되어

32 (1장) 다시 말하건대, 나는 늘 선원으로 바다에 나간다.

32 (1장) 마지막으로 내가 늘 선원으로 바다에 나가는 이유는

점층적으로 선원이라는 말을 강조하고 있다.

멜빌은 비교적 현대인이기 때문에 언어나 아주 낡아버린 옛날 사람들과 다르게 읽을 때 잡아내기 쉽다. 영어판과 대조해서 읽으면 된다.


33 (1장) 하지만 상선의 선원으로 여러 번 바다 냄새를 맡아 본 내가 이번에는 포경선에 머리를 들이미는 이유는 뭘까? 이 질문에는 운명의 여신들이라는 보이지 않는 경찰관, 나를 끊임없이 감시하고 남몰래 미행하며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영향을 미치는 그 경찰관이 누구보다 잘 대답할 수 있으리라. 

에필로그에 나온 운명의 여신이 1장에서 부터 나온다.

33 (1장) 그리고 내가 포경선에 오르는 것은 오래전에 정해진 원대한 섭리의 한 부분이었던 게 틀림없다. 

이렇게 섭리를 말해놓고서도 마지막까지 섭리를 깨닫지 못한다.

이 지점은 사실 <모비딕>의 기독교적 읽기가 가능한 부분이다. 신의 거대한 섭리를 드러내 보이는, 신의 위대함을 찬미하는 문학이라는 기독교적 읽기가 가능한 부분. 

33 (1장) 그건 훨씬 긴 공연들 사이의 짧은 막간극이자 일인극 같았다.

연극이라는 말이 나왔고 에필로그에서 연극은 끝났다라는 말이 나왔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링콤포지션의 흔적.


33 (1장) 대체 무슨 연유로 운명이라는 무대 감독이 내게는 포경선 항해의 허접스러운 배역을 안겨 주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처음 시작은 알수 없다고 말했고 에필로그에 가면 알아야 하는데 알아낸 흔적이 없다.


33 (1장) 이제 와서 모든 정황을 돌이켜보면 다양하게 변장하고 교활하게 내 앞에 나타나 내가 맡은 배역을 수행하도록 유도했을 뿐만 아니라 그 모든 게 편견에 치우치지 않은 자유 의지와 명석한 판단에 따른 선택이라는 망상으로 나를 유혹한 동기와 원인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슈마엘이 결국 깨닫지 못할 것이라는 암시 한 것일 수 있다.


1장에는 이 드라마의 화자인 이슈마엘이 어떤 사람인가, 바다는 무엇이고 선원은 무엇이고 바다로 가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그리고 이 드라마는 어떤 구조를 가지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막간극. 전체의 구조와 주인공과 내용이 1장에 다 놓여 있다. 그런데 제목운 '어렴풋이 보이는 것들'


이제 3장을 보자.


40 (3장) 한쪽에 걸린 아주 커다란 유화는

40 (3장) 그런데 한참을 진지하게 들여다면 보면서 고민을 거듭하고

커다한 유화 한 점이라고 하는 것을 설하면서 이 드라마의 어떤 것을 드러내 보이기 위한 것


40 (3장) 하지만 보는 사람을 가장 곤혼스럽고 어리둥정하게 만드는 건 그림 한가운데에 있는 물체였다.

40 (3장) 그 위로 길고 유연하며 불길해 보이는 검은 덩어리가 맴돌았다. 예민한 사람이라면 마음이 산란해질 정도로 눅눅하고 찌무룩하고 우중충한 그림이었다.

물체라고 얘기하고 나서 객관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어떤 사람이 보면 어떻고 이런 식으로 얘기한다. 그 불가사의한 그림. 이 그림이라고 하는 것운 정확하게 무엇인지 알수 없다는 의미가 있고, 어떤 대상이 가지고 있는 정확한 본질에 대한 이해는 사람마다 다를 수 밖에 없다는 상대주의 시각도 있다. 


41 (3장) 실제 화가의 의도는 이런 것 같았다.

화가의 의도에 대한 이슈마엘의 해석. 해석이 그림의 진실성을 드러내 보인다고 할 수 잇다.


이 드라마는 이슈마엘의 체험이자 이슈마엘이 화자로서 자기가 체험한 것을 해석해서 이야기 하는 것. 오늘날 우리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아주 과학적인 사람. 우리가 가끔 플라톤 <티마이오스>에 쓰여있는 우주론,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을 읽으면 콧웃음이 나온다. 그것은 그만큼 현대의 자연과학에 익숙해서져 있는 것. 고대 사람들이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은 지금과 다르다. 플라톤의 <국가>는 읽을만해도 <티마이오스>는 읽기가 힘들다. 우리도 모르게 우리 몸에 붙어 있는 근대 과학을 습득 했기 때문. 마찬가지로 사실은 우리가 대상에 대해서 이해하고 파악할 때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객관적으로 있는 그대로를 우리에게 그대로 전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해석들의 덩어리가 함께 오는 것. 유화가 대한 설명이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에는 의미부여와 해석의 문제. 사실은 어떻게 의미를 부여하고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것이 사실은 진리의 상당부분을 차지한다. 그래서 위대한 문학을 읽는 이유는 의미부여와 해석을 하는 힘을 길르기 위한 것. 우리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힘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세계를 해석해서 메타포에 포개어 셋상에 내놓는 것이 위대한 문학이고, 우리는 그것을 읽는 훈련을 한다.


그 다음에 9장 [설교]


77 (9장) 사랑하는 선원 동료 여러분, [요나서] 1장 마지막 절을 펴십시오. <야훼께서 큰 물고리를 시켜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니>

매플 목사가 설교를 하는데 찬송가가 나오고 설교를 하기 시작


77 (9장) 선원 여러분, 단 네장, 즉 이야기 네 개로 이루어진 [요나서]는 성경이라는 굵직한 밧줄을 이루는 제일 가느다란 가닥에 불과합니다.

이번 장을 유념해서 봐야한다. 텍스트 해석의 방법을 제시한다. 멜빌의 <모비딕>을 읽을 때는 매플 목사의 방법을 적용해야 한다. 설교이면서도 멜빌이 자기 텍스트를 읽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 '굵직한 밧줄을 이루는 제일 가느다란 가닥' 피쿼드 호는 가장 작은 가닥에 불과하지만 잘 살펴보면.. 


78 (9장) 요나의 바닷속 이야기가 우리 영혼의 얼마나 깊은 곳을 울리는지는 측량할 길이 없습니다!

78 (9장) 두 가닥으로 이루어진 교훈입니다.

욥이라는 사람이 있고 이슈마엘이 있고 에이해브가 있는데 착한 욥과 나쁜 욥. 원래 성서로부터 두 명의 욥이 분리되어 나와서 이슈마엘과 에이해브가 된 것. 이슈마엘은 꼭 욥과 닮은 건 아니지만 특정 부위는 닮은. 


78 (9장) 하나님의 명령이 가혹하다며 의도적으로 따르지 않은

의도적으로 따르지 않은 요나. 바로 에이해브


86 (9장) 멍들고 지친 요나는 여전히 드넓은 바다가 우르릉거리며 울리는 소리를 듣던 두 개의 바닷조개 같은 귀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따른 요나


86 (9장) 그 명령은 무엇이었을가요, 여러분 <거짓>에 맞서 <진실>을 설파하라는 것!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멜빌이 하겠다고 하는 것. 이 드라마가 온갖 허위를 헤쳐내고 나서 무엇이 참다운 것인지 드러내보이겠다는 것.


121 (16장) 숭고한 비극에 어울리는 대단히 화려한 인물이 된다.

에이해브는 비극의 주인공이라고 말했는데 여기 그 대목이 나온다. 비극적 영웅.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