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세계 | 04 세속세계의 폭력적 완결


필사본이 있어서 별도로 강의 내용을 요약하지 않았다.


강유원 "책과 세계" 강의노트 4 | 2004

지난 번에 방법론적 전체주의에 대해 글을 써오라고 과제를 내주었는데 그 중 하나를 소개하겠다. 이 글을 쓴 사람은 지난 학기 동국대학교에서 종교의 이해에 대한 내 강의를 들은 학생으로 그 강의내용을 토대로 과제를 작성했다.


종교에 대해 알아보려면 다음의 순서를 거친다.


1. 종교의 definition(정의) - 종교학개론이 이에 속하며, 'what is' question 부터 시작한다. what is 라는 질문은 철학 공부에서 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 속에서도 끊임없이 반복해야한다. 


2. 종교의 origin(기원) - 종교의 심리학적 기원, 사회학적 기원을 따져본다. 이는 기원 그 자체에 대한 탐구와 함께 심리적 강박 행위 등이 종교의 기원이 된다. 역사적 전개 과정을 따지는 historical search도 반드시 필요하다. historical search 안에는 how to = mechanism까지도 들어간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알아보는 것이다. 


3. today - 오늘날의 상황을 따져본다. 이것도 엄밀히 말하면 역사적 탐구에 속한다.


위의 1, 2, 3을 모두 아우르면 대상에 대해 전체적 인식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이 방법론적 전체주의에 입각한 탐구 방법이다. 일테면 '사회학은 무엇인가'를 알려면 '사회는 무엇인가'부터 따져봐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 전체를 모두 묶어서 '개념(Begriff)이라고 한다. 종교의 개념을 안다는 것은 그것이 본래 무엇이었고 어떻게 전개 되었고 오늘날 어떤 모습을 가지는 지를 총괄해서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개념적으로 파악한다begreifen"고 말한다.


물론 여러분이 모두 철학공부를 할 것을 원하지도 않거니와 철학을 통해서만 진리에 이를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자기가 어떤 분야에서 어떤 주제에 대해서 탐구를 하건 간에 이러한 개념적 파악을 반드시 수행하기를 바랄 뿐이다.


예를 들어보자. 이번에 스티븐 호킹이 자신의 빅뱅 이론을 수정했다. 그래서 이 사건에 대해 취재를 해본다고 치자. 이 때 "천체 물리학자 누구를 만나면 되나?"하면서 contact list를 뒤지면 이는 사건에 대한 개념적 파악과는 상당히 멀어지는 일이 되고 만다. 물론 구체적인 실행과정에서 contact list를 짤 수는 있을지언정 일단 머리 속에서 "도대체 빅뱅이 무엇인가?"와 "이 이론이 어떻게 전개 되었는가"를 알고 있는 있어야한다. 이런 상태에서야 비로소 성과를 낼 수 있다. 


가령 회사에서 사원들에게 마케팅 기획서를 쓰라고 한다면 일단 자신이 팔려는 상품이 뭔지 what is question 부터 자기 머리 속에 들어 있는 상태에서부터 해 나가야 된다. 이는 학적 탐구 만이 아니라 일상적인 생활 영역에서도 늘 머리 속에 집어 넣고 있어야 한다.


공부를 하는 사람은 늘 자신이 왜 공부를 하고 공부가 무엇인지 항상 따져야 한다. 공부를 하다 보면 어느 순간 헛기운이 들게 된다. 이때 거기에 휩쓸리면 한 순간에 망가진다. 공부하는 사람일수록 이러한 질문을 계속 던지면서 자기 자신을 늘 감시해야 한다.

왜 나는 공부를 하는 것이며 도대체 공부는 무엇이냐에 대해 적어도 3개월에 한 번씩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하고 이에 대한 답을 써야 한다. 그래야 삐딱하게 나가지 않는다. 이를 집약한 것이 호칭 문제이다. 가령 "강유원은 무엇이냐, 누구냐, 어떻게 불리어야 하느냐"를 항상 스스로에게 물어야하며,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강사면 "강사는 무엇이고 강사는 어떠해야 하는가"를 계속 물어보면서 자신을 다져야 한다.


김현이 지적했듯이 이문열의 『황제를 위하여』는 매우 잘 써진 글이다. 고백하건데 나는 이 책을 베껴쓴 적이 있다. 베껴쓰고 나니 무협지적인 이빨과 글빨이 몸으로부터 팍 생겨났다. 

『영웅』에 나온 이연걸과 견자단의 초식 대결. 이는 무협영화에나 나오는 것이 아니다. 고수들은 그렇게 한다. KungFu (工夫)에는 내 18반병기, 외 18 반병기가 합해져 총 36기를 이룬다. 이러한 공부를 통해 내공과 외공이 합치된 사람들은 초식대결만으로도 승부를 가릴 수 있다. 이를 학에 대입해보면 어떻게 해야할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김승옥의 단편소설, 왕십리의 조혜일 등의 글도 아주 좋다. 


그리고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처럼 끊임없이 자신의 글을 줄이는 연습을 하라. '오캄의 면도날, 최소한의 요소를 가지고 사태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태도도 반드시 필요하다. 말 길게 하는거 좋은 거 아니다. 중언부언하는 것도 좋지 않다.

글이 잘 안 읽히면 그 글을 써보면 제대로 쓴 글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오늘은 근대에 관해서 얘기하려 한다.

서양 근대는 로마인들이 말한 단순한 실천이 이데올로기적인 근거로까지 마련된 시대이다.


프린트물을 보자. 1789-1848년의 60년간을 다루는 것이 홉스봄의 『혁명의 시대』이다.

"낱말들은 때때로 기록보다 더욱 효과적인 증거가 된다. 기본적으로 이 책이 다루고 있는 60년이란 기간 동안 창안되거나 그 현대적 의미를 얻은 몇 개의 영어 낱말들을 생각해 보자. '공업'(industry),' 공업가'(industrialist), '공장'(factory), '중류계급'(middle class), '노동자 계급'(working class), '자본주의'(capitalism) 및 '사회주의'(socialism) 등이 그러한 낲말들이다. '철도'(railway), 정치적 용어로서 '자유주의적'(liberal)과 '보수적'(conservative), '국적'(nationality), 과학자'(scientist)와 '기술자'(engineer), '프롤레타리아'(proletariat) 및 '경제공황'(economic crisis) 뿐 아니라 '귀족'(aristocracy)도 이에 포함된다. '공리주의자'(utilitarian), 통계학(statistics),"

미국의 대륙 횡단 철도가 세워지면서 미국에 자본주의적 시스템이 확립되었다.

이 과정에서 생겨나는 자본가의 야망을 서술한 책으로 애인 랜드의 『아틀라스』가 있다.


그런데 1789년이라는 해가 왜 선택 되었을까? 1789년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바로 프랑스 혁명이다. 역사학에서 '1789년의 세계'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는 매우 의미있는 해이다. 자기 생일이 언제인지는 잊어버릴 지언정 "1789년"은 잊어버리면 안된다. 1848년은 바로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을 발표한 해이다. 대충 한국의 해방부터 지금까지에 해당하는 이 짧은 60년 동안 유럽 대륙에서 프랑스 혁명부터 공산당 선언까지 일어났다.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을 들라면 신석기 농업혁명과 1789년의 세계이다. 고고학적 관점에서보면 지금은 철기 시대이다. 구석기->신석기->청동기->철기 시대 중 철기 시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문명사적으로 보면 신석기 농업혁명부터 정착 생활이 시작된다. 그리고 농업 중심의 사회이다. 그러나 1789년에 이르러 사람이 사는 기본 방식이 바뀐다. 도시의 시대요 산업의 시대가 된다. 사실상 Modern Age(근대)는 1789년부터 시작된 셈이다. 1500년경에 산 사람은 사실상 기원 후 2세기 로마에 살던 사람이랑 사는 모습이 비슷한 셈이다. 그러나 1800년대의 사람과 1900년대의 사람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근대에 대해 공부하고자 한다면 홉스봄의 『혁명의 시대』 서문을 반드시 읽어 보아야 한다. 근대에 대해 알려고 데까르트의 책을 읽으면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데까르트가 왜 회의주의에 빠졌는지를 알려면 사실 데까르트가 살아간 배경을 보면 된다. 그 당시는 유럽의 30년 전쟁 시기였다. 오랜 전쟁 기간 동안 인간은 자신의 신념을 확고히 하고 살 수는 없다. 이는 철학책 백날 읽어봐야 알 수 없다. 역사책 한 번 읽으면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이처럼 철학 공부를 하려고 해도 우선 역사책을 읽어서 그 시대에 대해 전반적인 지식을 쌓은 후 그 시대의 철학자들이 써 놓은 저작을 읽어 나가는 순서로 공부해야 한다.


Modern Age 는 합리성(기계적), 몰인간(도덕 가치 부인), 실용주의가 전면에 나선다. 그러니 당연히 보들레르 같은 이는 거리나 산보하게 되고 허무주의에 빠지게 된다. 


자연에 대한 시각이 달라진다. 1789년 이전의 자연은 눈에 보이는 자연이지만, 1789년 이후의 자연은 법과 제도적 질서가 자연이 된다. 일종의 제2의 자연이다.


불심 검문할 때 주민등록증의 사진과 내 얼굴이 맞지 않으면 경찰서에 끌려가는 일이 있었다. 내가 있어야 주민증록증도 있는건데 그것이 나보다 더 실체적인 것이 되어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모든 것이 녹아 내린다"고 지적한다. 볼펜 장수가 돈 벌까, 만년필 장수가 돈 벌까? 볼펜 장수다. 언제든 물건이 소진되어 재생산 되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건축업자들은 계속 건물을 허물었다 지었다 한다. 이것이 곧 근대의 허무주의를 낳는다. 1789년 이후의 세계는 이처럼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함께 가지고 전개 된다.


이 체제가 갈 때 까지 가게 되면 '인간'이 없는 세계가 된다. 가령 아날학파의 역사 기술에 따르면 토대, 장기지속만 표현할 수 있으면 인간 없이도 역사 기술이 가능하다.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인류학, 알튀세르의 구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를 보라.

알튀세르는 인간이 빠져나가야 휴머니즘적 마르크스주의가 과학적 마르크스주의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갈 때까지 가본 근대의 모습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이 등장한다. 아날학파의 역사 서술이 명쾌하고 알튀세르의 과학적 마르크스주의가 뛰어난 체계를 가지고 있으나 이들을 읽고 나면 인간이 배제 되어 있어 허무해진다. 이는 사실 16,17,18세기에 과학, 철학을 하던 사람들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역사라는 큰 틀에서 보면 1789년에서 2004년에 이르는 기간은 특별히 깊이있게 연구하지 않는 한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기간이다.


토마스 홉스, 『리바이어던』 홉스는, 생몰 연대는 그 이전이어도 '1789년의 세계'에 속하는 사람이다. 여기에 딱 들어 맞는 이가 아담 스미스다. 그는 1723에 태어나서 1790년 까지 살았다. 홉스의 리바이어던은 1651년에 나왔다. 『종의 기원』은 1859년에 나왔다. 1859년은 아주 먼 옛날로 느껴지지만 사실 『종의 기원』에서 전하는 "경쟁하는 인간"은 오늘날 세계 안에서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일테면 조선 시대에 선비 집안에서 애가 태어나면, 태어나면서 부터 입신양명이라는 목적이 부여된다. 서양 중세 시대의 세계는 신의 뜻이 실현되는 공간이므로 신의 영광을 위해 살면 된다. 그러나 근대 사회는 철저히 목적이 없는 공간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결국 사람들이 하는 일이란 쌈질 하는 것일 뿐이다.


『리바이어던』이 절대주의적 국가의 정당화라고 말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홉스의 인간관이다. 첫번째 시간에 '인간관'이 중요하다는 말을 했었다. 홉스의 인간관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기계처럼 무한히 움직여 간다. 즉 목적이 욕구 충족에 있다. 이를 홉스는 자연과학적으로 정학적으로 세팅한 사람이다.


아담스미스의 인간관 역시 이익 또는 이기심 중심이다. 스미스의 인간관은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인간"이다. 그는 도덕적 실천까지 고려하는 인간을 없애버리고 눈에 보이는 이익만을 따지는 것을 인간으로 규정해 버린다. 그런데 스미스는 대학의 윤리학 교수였음을 잊지 말자. 이게 도덕이다. 자기 이익 잘 따지는게 도덕이라는 말이다.


『종의 기원』 - "목적이 진보라 해도 과정은 투쟁... 무한경쟁에 근거를 둔 ... 인간은 더이상 도덕의 겉옷을 걸칠 수 없게 되었고 ... 쓰라린 투쟁"


지금까지 유지하고 지켜왔던 도덕이라는 개념은 이제 이론의 지평에서든 실천의 지평에서든 사라져 버린다. 그래서 "천박한 자본주의"라는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그것 자체로 가치 판단을 할 수 있는 체계가 아니다. 이것이 근대 세계가 추구해온 모습이다.


그런 인간들이 당연히 하나의 machine이 된다. 이 사람들은 특별히 자신 안에 내재된 본성이 없다.욕구만 있다. 욕구 가진 사람을 교육시켜서 필요한 장소에 임의로 배치하기만 하면 거기에 적합한 기계가 된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적 인간이다.

자본주의 안에서 고용되고 배치되지 않아 기계가 못된 사람들을 실업자라고 한다. 이들은 자본주의적인 노동(labor)은 하지 못해도 자신의 능력을 남에게 알려주는 등의 일(work)은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배치가 되어 있지 않으므로 부랑자가 된다. 이들은 감옥에 쳐 넣어야 한다. 그래서 감옥이 탄생한다. 이제 사람을 그의 capacity 로만 파악하게 되므로 여기서 밀려나는 사람은 완전히 떠밀려 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관과 사회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아야 한다. 현 사회가 어떤 인간관을 가지고 인간을 취급하는 지를 보아야 한다. 지금 농촌에서 오로지 전통적인 방식으로 농사 짓는 사람은 없다. 농사 역시 공업화된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완전한 의미에서 자급자족 하는 곳은 없다. 가령 서울에서 전기가 끊어지면 어떻게 되겠는가. 여기서 사는 인간은 끊임없이 투쟁, 경쟁하는 인간이다. 계속해서 경쟁해서 이겨야 한다는 이데올로기가 주입되지 않으면 안된다.


현대 사회는 끊임없는 경쟁 속에서 산다. 현대 사회의 운용 원리를 아주 도식해서 보면 이 투쟁, 경쟁을 보이지 않는 손(시장)에 맡기자는 입장이 있고 보이는 손(국가)에 맡기자는 입장이 있다. 그런데 사실 보이지 않는 손이 어딨는가? 큰 손들이 있는 것이지. 차라리 눈에 보이는 국가가 나을 수도 있다. 데모도 할 수 있다. 삼성 본관에 가서 데모해봤자 이건희가 눈 하나 깜짝할까? 마이바흐타고 '흥!'하면서 그냥 가지.


끊임없는 경쟁을 강요하는 사회 안에서 그냥 '우리 끼리 착하게 살자'고 다짐하고 산 속으로 들어가 살 수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그들 끼리만 해피하게 살다 죽는거다. 사실 절간 역시 할머니들 시주 돈 없이는 유지가 안 된다.


1789년 이후의 세계에 살며 이를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은 당연히 정치 경제학을 공부해야 한다. 경제적으로 세계가 흘러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흘러왔는지 역사적 탐구를 해야 한다.


1789년 이후 세계를 움직인 네덜란드, 스페인, 영국, 유에스 등의 이른바 Agent State들이 있어왔다. 홉스봄이 지적하고 있듯이 1789-1848년의 위대한 혁명은 '공업 자체'의 승리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공업의 승리였다. 자본주의는 이윤을 위한 생산을 경제적 활동의 기본으로 삼는 체제이다. 한국은 과학이 많이 발달하였음에도 왜 아직도 빌빌거리는가? 자본주의적 과학의 전통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승리였으며 부르주아적 자유사회의 승리였고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하는 특정지역의 여러 경제와 국가들의 승리였던 것이다.


agent state들을 한번 살펴보자. 로마가 전 세계 패권을 잡을 수 있던 주요 요소는 군사력이었다. 이탈리아 내에서 자급자족이 안되어서 끊임없이 식량 운송에 필요한 시칠리아를 식민지로 두었다. 즉 식량 확보를 목표로 하여 군사력, 속주, 시민권을 유지하였다.


근대 자본주의 시스템의 축은 도시다. 그래서 현재 사는 사회 체제가 맘에 안들면 두 가지를 하면 된다. 첫 째로 도시를 해체하여 소규모 자급자족 생활 공동체로 분산시켜야 한다. 쉽게 말해 먹고 사는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맘 먹고 먹고 사는 방식을 바꾸자고 하면 Agent State인 유에스가 가만 두지 않는다. 유에스는 로마가 가진 군사력과 더불어 자본력도 가지고 있다. 맘에 안드는 나라가 있으면 그대로 군사력과 헤지 펀드로 때려 버린다. 결국 US를 없애야 먹고 사는 방식이 바뀔 수 있다. 그래서 반 자본주의는 반미와 연결된다. 환경운동가들이 말하기를 전 세계인들이 미국처럼 살려면 지구가 몇 개는 더 있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쌀밥 먹던 이들이 보리밥 먹고 살진 못한다. 그러니 살던 방식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남을 약탈하는 것이다.


유에스에서 일할 때다. 아침에 회사에 출근하면 밤새 에어콘을 틀어 놓아서 빌딩 전체가 냉동 창고다. 월마트 같은 곳을 가면 거기는 거의 축구장이다. 거기 있는 물질적인 풍요를 보면 왠만한 사람이 아니면 압도당한다. 구경꾼들도 압도 당하는데 거기서 사는 이들은 어떻겠는가. 완전히 거기에 지배된다. 시차가 세 개나 되는 넓은 US 전역에 밤새 에어콘과 보일러를 켜 놓는다고 생각해봐라.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소비된다. 그러한 풍요를 유지하기 위해 US의 지도자들이 전 세계를 착취하면서 날뛰는 것이다. 한번 그 풍요를 맛본 이들은 절대 그 맛을 잊지 못한다. 그래서 불법 체류자가 끊임없이 늘어난다. 미국을 움직이는 지식인, 자본가가 바로 그런 곳에서 살아간다. 풍요를 한 번 맛본 사람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따라서 60년대 체 게바라, 카스트로 등의 제 3세계 해방운동, 운동을 뒷받침하던 중국 등은 굉장히 올바른 패러다임을 갖고 움직였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은 등소평 이후 사회주의를 포기했다. 결국 목표를 '미국처럼 살아보겠다'로 바꾼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절대 중국이 그렇게 살도록 놔두지 않는다. 그래서 미국이 현재 중국을 주적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절대로 북한을 그대로 놔두지 않는다. 부시가 되든 케리가 되든 북한을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목표는 똑같기 때문이다.


답은 하나다. 아무리 큰 건물도 한 구탱이만 무너지면 붕괴해 버린다. 유에스에게 깔짝깔짝 거리면서 귀찮게 하는 티눈 같은 존재인 이란과 북한. 이란과 북한에서 유에스의 영향력에 균열이 보이면 유에스가 붕괴할 가능성이 보인다. 


세계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가 Agent State인 미국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책 몇 권 읽는다고 자본주의가 극복되기는 힘들다. 마르크스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상상하기 힘들 만큼 유에스의 힘이 매우 커져버렸다.


'도시가 자본주의의 중심이다'라고 데이비드 하비(『포스트 모더니티의 조건』, 한울)가 말했다. 하비는 지리학과 교수이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놀고 있는 땅을 도시화 한다. 도시화해야 자본에게는 이윤이 남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시간과 공간을 압축시킨다. 무인 공장, 디지털화, KTX, Internet. 이렇게 시간과 공장을 압축할 수록 profit이 늘어난다. 즉 자본주의 시스템을 깨기 위해서는 이 압축을 해제시켜야 한다. 도시를 해체해야하고 느리게 살아야 한다. 그래서 국지적 차원에서는 시공간 압축을 극복하고, 자본주의적 세계차원에서는 유에스가 조금 헐벗고 굶주리게 해야 한다. 



2004. 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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