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 유리알 유희1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12. 5. 25.
서문_유리알 유희의 역사를 일반인에게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하여
유희 명인 요제프 크네히트의 전기
1 소명
2 발트첼
3 연구시절
4 두 수도회
5 사명
6 유희 명인
7 재직시대
8 양극
9 대화
12 .... 어떻게 보면, 경박한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보다 존재하지 않는 사물을 표현하는 것이 더 쉽고 책임이 덜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경건하고 야심적인 사가에게는 정반대이다. 즉 있음을 증명할 수도 없고, 있을 것 같지도 않은 어떤 것을 경건하고 양심적인 사람들이 어느정도 실재하는 것처럼 다룸으로써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고 생겨날 수 있는 가능성에 한 걸음 다가서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것들만큼 말로 표현하기 힘든 것도 없지만 또 그만큼 절실히 사람들 눈앞에 그려보여 주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도 없다.
17 그 법칙, 즉 유희의 기호와 문법은 고도로 발달한 일종의 신비로운 언어를 구사한다. 거기에는 여러 학문과 예술, 특히 수학과 음악이 관련되어 있으며, 거의 모든 학문의 내용과 성과를 표현하고 서로 연관 지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유리알 유희는 우리문화의 내용과 가치 전체를 가지고 하는 유희이다. 예술 전성시대의 화가가 자기 팔레트의 물감들을 가지고 유희하듯 모든 것을 가지고 유희를 하는 것이다. 인류의 창조적 시대에 인식과 드높은 사상과 예술 작품에서 이룩해 내었던 것, 그 뒤를 이은 학구적 관찰의 시대가 개념화하여 지적 재산으로 만들었던 것, 정신적 가치의 이 엄청난 자료 전체를 가지고 유리알 유희를 하는 사람은 마치 오르간 연주자가 파이프오르간을 치는 것처럼 연주한다. 그런데 이 파이프오르간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한 것이어서 건반과 페달은 정신의 전 우주를 더듬고 음전은 거의 해야하릴 수가 없으며, 이론적으로 보자면 이 악기의 연주를 통해 정신세계의 모든 내용이 재현될 수 있다.
54 우리는 고전 음악을 우리 문화의 정수요 총화라고 여긴다. 그것은 우리 문화의 가장 뚜렷하고 독특한 몸짓이자 표명이기 때문이다. 이 음악 속에 우리는 고대와 기독교의 유산을, 명랑하고 용감한 경건함의 정신을, 탁월한 기사도의 도덕을 담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고전적인 문화의 태도는 궁극적으로 도덕을, 태도로 응축된 인간적 행동의 모범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1500년에서 1800년 사이에 정말 다양한 음악들이 만들어졌는대, 양식과 표현 수단은 가지각색이지만 그 정신, 아니 도덕은 모두 동일하다. 고전 음악으로 표현된 인간적 태도는 늘 똑같다. 그것은 언제나 같은 종류의 생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같은 방식으로 우연을 넘어서려고 노력한다. 고전 음악의 태도란 이런 것을 의미한다. 인간 존재의 비극을 아는 것, 인간의 운명을 긍정하는 것, 용감함, 청량함! 그것이 헨델이나 쿠프랭의 미뉴에트에 드러나는 우아하이든, 이탈리아 작곡가들이나 모차르트에게서 볼 수 있는 사랑스러운 몸짓으로 승화된 육감성이든, 혹은 바흐에게서 나타나는 조용하고 침착한 죽음에의 각오이든 상관없이 거기엔 언제나 불굴의 의지, 죽음을 무릅쓴 용기, 기사도 정신, 초인적인 웃음소리와 불멸의 청랑함이 울리고 있다. 우리의 유리알 유희에도, 우리의 전체 삶과 행위와 고뇌에도 그럼 울림이 깃들어야 한다.
409 가끔 우리는 서로 암시적으로만 다른 말로 번역될 뿐인 두 가지 다른 표현법과 언어를 가지고 있다는, 결코 상대방을 이해할 수 없으며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존재라는 생각이 들어. 그리고 우리 중 어느 쪽이 대체 진정한, 완전한 가치가 있는 인간인지, 자네들인지 아니면 우리인지, 또 우리 가운데 어느 한쪽이기는 한 것인지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네. 내가 자네들 수도회 사람들이나 유리알 유희자들을 존경심과 열등감, 질투심을 느끼며 우러러본 시기가 있었지 마치 영원히 명랑하고 영원히 유희를 즐기는, 자신의 존재를 향유하고, 고통이 가닿지 못하는 신이나 초인을 바라보듯이 말이야, 어떤 때는 자네들이 부러웠다가 곧 불쌍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경멸스러워 보일 때도 있었어. 거세된 사람들, 인위적으로 영원히 유년 상태에 억류되어 있는 사람들로 보이기도 했어. 아무 번민도 없이, 깨끗하게 울타리를 친 잘 정돈된 놀이터나 유치원의 세계에서 어린애처럼 순진하게 지내며, 모두 말끔히 코를 닦고, 쓸데없는 감정이나 생각을 자극하는 일은 가라앉히고 억누른채, 평생 동안 얌전하게 아무 위험 없이 피 흘리는 일 없는 유희나 하면서, 또 방해가 될 만한 모든 생명의 충동이나 격정, 진정한 정열, 격앙 따위는 명상 요법으로 즉시 제어하고 돌려 중화시키면서 사는 사람들 말이야. 이 세계는 인공적이고 살균된 세계, 학교 선생이 시키는 대로 할 뿐인 소심하고 제한된 세계, 반쪽뿐인 세계요 피상적인 세계에 불과하지 않을까?
416 명랑성에 대해 자네에게 조금 더 말하고 싶어. 별의 명랑성과 정신의 명랑성, 우리 카스탈리엔의 명랑성에 대해서. 자네는 명랑성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어. 아마 슬픔의 길을 걸어야 했기 때문일 것야. 그래서 모든 밝음 과 쾌할함, 특히 우리 카스탈리엔의 그것을 천박하고 유치하고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자네에겐 그것이 현실의 두려움이나 심연을 피해 순전한 형식과 공식, 추상과 세련의 명석하고 질서 정연한 세계로 도피하는 것으로 보이는 거야. 그러나 슬픔에 찬 벗이야, 그런 도피도 있을 수 없고, 공식들을 가지고 유희나 일삼는 비겁하고 겁 많은 카스탈리엔 사람도 없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정한 명랑성, 하늘과 정신의 명랑성이 가치와 빛을 잃는 것은 아니라네.
417 이런 명랑성은 시시덕거림도 자기만족도 아니라네. 그것은 최고의 인식이자 사랑이고, 온갖 현실에 대한 긍정이며, 모든 심연과 나락의 절벽 끝에 서서도 정신 차리고 깨어 있는 일이야. 성인과 기사의 덕이지. 어지럽힐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미의 비밀이며 모든 예술의 본체라네. 인생의 찬란함과 무서움을 시구의 춤추는 걸음걸이로 찬양하는 시인이나, 그것을 순수한 실재로서 우리게 하는 음악가는 처음에는 우리를 눈물과 고통스런 긴장 속으로 이끌어 갈지몰라도 결국 빛을 가져오는 자, 이 지상에 더 많은 기쁨과 밝음을 가져다주는 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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