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마누엘 칸트: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
- 책 밑줄긋기/책 2023-25
- 2025. 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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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 - ![]() 임마누엘 칸트 지음, 백종현 옮김/아카넷 |
책을 펴내면서 | 005
제1부 『순전한 이성의 한계들 안에서의 종교』 해제 | 015
해제 | 017
관련 주요 문헌 | 067
제2부『순전한 이성의 한계들 안에서의 종교』역주 | 109
※역주의 원칙 | 111
※유사어 및 상관어 대응 번역어 표 | 115
『순전한 이성의 한계들 안에서의 종교』 번역 및 주석 | 147
찾아보기 | 467
일러두기 | 469
인물 찾아보기 | 470
개념 찾아보기 | 472
제1판 머리말
149 도덕은 자유로운,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자신의 이성에 의해 자신을 무조건적인 법칙에 묶는 존재자인 인간의 개념에 기초하고 있다. 그런 한에서 도덕은, 인간의 의무를 인식하기 위해서 인간 위에 있는 어떤 다른 존재자의 이념(관념)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그 의무를 지키기 위해 법칙 자체 이외의 어떤 다른 동기를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만약 인간에게 그러한 것이 필요하다면, 적어도 그것은 그 자신의 탓(잘못)이다. 그러한 필요는 [그 자신 외의] 다른 무엇에 의해서도 채워질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 자신과 그의 자유에서 생겨난 것이 아닌 어떤 것도 인간의 도덕성의 결핍을 메워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덕은 그 자신을 위해서 객관적으로, 의욕하고자)함과 관련해서나, 주관적으로 할 수 있음과 관련해서나) 결코 종교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오히려 순수 실천이 성의 힘에 의해 [덕분에] 그 자신만으로 충분한 것이다. 무릇 도덕의 법칙들은 그에 따라 취해질 수 있는 모든 목적들의 최상의 (심지어는 무조건적인 조건으로서의, 준칙들의 보편적 합법칙성의 순전한 형식에 의해 구속력을 가지므로, 도덕은 도대체가 자유로운 의사의 어떠한 질료 [실질]적 규정근거도 전혀 필요가 없다. 다시 말하면, 무엇이 의무인가를 인식하기 위해서나 의무가 이행되는 것을 촉구하기 위해서나 아무런 목적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도덕은 의무가 문제될 때에는 일체의 목적들을 능히 도외시할 수 있고 또한 그렇게 해야만 한다. 그래서 예를 들어, 내가 법정에서 증언을 할 때 진실하게 해야만 하는지, 또는 나에게 위탁된 타인의 재산에 대한 반환 청구가 있을 때 신의를 지켜야만 하는지 (또한 할 수 있는지) 어떤지를 알기 위해서는 내가 그 공언을 함으로써 성취하고자 하는 목적에 대해 물을 필요는 전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목적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상관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의 고백이 그에게 법적으로 요구되었을 즈음에 아직도 어떤 목적을 찾아볼 필요를 느끼는 자는 그 점에서 이미 비열한 자인 것이다.
153 최고선의 가능성을 위해서는 우리는 유일하게 이것의 두 요소를 통합할 수 있는, 하나의 보다 높고 도덕적이고, 최고로 신성하며 전능한 존재자를 상정하지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이 이념은 (실천적으로 고찰하면) 공허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이념은 우리의 모든 행동거지에 대해 전체로 보아 이성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는 어떤 하나의 궁극목적을 생각하려는 우리의 자연적 필요욕구를 채워주기 때문이다. 그렇지 못하면 이 필요욕구는 도덕적 결단의 장애가 될 터이다. 그러나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이념이 도덕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지, 도덕의 토대가 아니라는 점이다. 목적이란, 그것이 되기 위해서 이미 윤리적 원칙들을 전제하는 것이다.
제1논고
175 이 세계가 사악한 상태에 놓여 있다는 탄식은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아니 그보다도 더 오래된 문예만큼이나 오래된 것이고, 정말이지 모든 시가들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것인 사제종교의 시가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시가들은 세계를 선으로부터 시작한 것으로 그리고 있다. 황금시대로부터라든가, 낙원에서의 삶으로부터라든가 또는 천상의 존재자들과 함께하는 보다 더 행복한 삶으로부터 시작한 것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가들은 이러한 행운은 한낱 꿈처럼 이내 사라져버리고, 악-물리적인 악이 언제나 짝을 이루는 도덕적인 악의 상태로 타락하여 더욱더 사악한 상태로 점점 더 빠르게 추락해가는 것으로 그린다.
178 어떤 범행자가 악한 인간이라는 판단을 확실하게 경험에 기초해서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어떤 인간을 악하다고 부르려면, 몇몇의, 아니 단 하나의 의식적인 악한 행위로부터 그 행위의 기초에 놓여 있는 악한 준칙을 선험적으로 추론해내야만 한다. 그리고 이 준칙으로부터 그 행위하는) 주관 안에 보편적으로 놓여 있는, 모든 특수한 도덕적으로 - 악한 준칙들의 근거 - 이 근거 자신이 다시금 준칙인바를 선험적으로 추론해내야만 한다.
178 그러나 (자연)본성이라는 표현이 (보통 그러하듯이) 자유로부터의 행위들의 근거와 반대되는 것을 의미한다면, '도덕적으로-선한' 또는 '도덕적으로-악한'이라는 술어들과 곧바로 모순이 되는바, 이러한 [자연]본성이라는 표현에 부딪치지 않으려면, 여기서 인간의 [자연]본성이란 눈에 띄는 모든 행실에 선행하는, 단지 (객관적 도덕법칙들 아래에서) 자유 일반을 사용하는 주관적 근거(기초)를 의미하는 것뿐임에 주의해야 한다. 무릇 이러한 근거는 어디에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관적 근거는 언제나 다시금 그 자신이 자유의 작용이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윤리적 법칙에 관련한 인간의 의사의 사용 또는 오용이 인간에게 귀책될 수 없겠고, 인간 안의 선 또는 악을 도덕적이라 일컬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악의 근거는 경향성에 의해 의사를 규정하는 객관 안에, 자연적 추동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사가 자기의 자유 사용을 위해 스스로 정하는 규칙, 다시 말해 준칙에 놓여 있다. 그런데 이 준칙에 대해서는, 그것을 채택하고, 오히려 그에 대립되는 준칙을 채택하지 않는 주관적 근거가 인간 안의 무엇인지를 더 이상 물을 수 있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 근거가 최종적으로 그 자신 더 이상 준칙이 아니고, 순전한 자연적 추동이라면, 자유의 사용은 전적으로 자연 원인들에 의한 규정들로 환원될 수 있을 터인데, 그러나 그런 일은 자유에 모순되기 때문이다.
180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을 다른 가능한 이성적 존재자들과 구별해주는) 이러한 [선·악의] 성격들 중의 하나에 대해서, '그것은 인간에게 선천적(생득적)이다'라고 말할 것이나, 그럼에도 그때, (그 성격이 악할 경우) 그 성격들의 탓이 자연에 있다거나, (그 성격이 선할 경우) 그 공이 자연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 그 성격의 창시자라고 분수를 지킬 것이다. 그러나 그 자신 언제나 다시금 자유의사 안에 놓여 있을 수밖에는 없는, 우리 준칙들의 채택의 제일 근거는 경험에서 주어질 수 있는 사실일 수가 없기 때문에, (도덕법칙과 관련해서 이 준칙 또는 저 준칙을 채택하는 주관적인 제일의 근거로서) 인간 안에 있는 선 또는 악이 선천적이라 함은 한낱 그것이 경험 중에서 주어지는 [나타나는] 모든 (출생 시까지 소급되는 유년기의) 자유 사용에 대해 기초로 놓인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출생과 동시에 인간 안에 현전하는 것으로 표상된다는 그러한 의미일 뿐, 출생이 바로 선악의 원인이라는 그러한 의미가 아니다.
185 도덕법칙은 그 자체만으로, 이성의 판단에서, 동기가 되며, 도덕법칙을 자기의 준칙으로 삼는 이는 도덕적으로 선하다. 무릇 법칙이 그 법칙과 관련되는 행위와 관련하여 누군가의 의사를 규정하고 있지 않다면, 법칙과 대립하는 어떤 동기가 그의 의사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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