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원의 책담화冊談話(https://booklistalk.podbean.com)에서 제공하는 「ε. Vindication of Tradition」를 듣고 정리한다.
2024.08.15 ε. Vindication of Tradition, Schumacher(2)
• 야로슬라프 펠리칸Jaroslav Pelikan, ⟪전통을 옹호하다 - 전통의 의미와 재발견, 회복에 관하여⟫ (The Vindication of Tradition: The 1983 Jefferson Lecture in the Humanities, 1984)
• 텍스트: https://buymeacoffee.com/booklistalk/vindication-tradition-schumacher
야로슬라프 펠리칸의 《전통을 옹호하다Vindication of Tradition》를 꽤 여러 번에 걸쳐서 읽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뒤에 얀 슈마허Jan Schumacher가 쓴 "야로슬라프 펠리칸에 관하여"라는 글, 이 글은 《Key Theological Thinkers: From Modern to Postmodern》에 들어 있는 글 하나이다. 슈마허의 이 글을 읽음으로써 펠리칸이라고 하는 사람이 어떤 맥락 속에서 연구를 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의 연구 방법론은 무엇인가 이런 것들을 먼저 살펴보겠다. 우선 약력을 보면 "오하이오주 에크런에서 태어났고 슬로바키아 출신 이민자였다. 그의 조부와 아버지는 모두 슬로바키아계 루터파 목회자들이었다." 슬로바키아계 루터파 목회자라는 건 굉장히 독특한 배경이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러시아 정교회 전통 속에 있을 텐데, 슬로바키아계이면서 루터파, 경계에 서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배경들이 공부로 연결될 때는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가, 이런 것도 살펴볼 수 있는 그런 기회가 되겠다. 22살에 학업을 마치고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특정 교단과 직접 관계된 기관에서, 때로는 교단으로부터 독립적인 환경에서 연구를 이어갔고, 그다음에 이제 1946년에서 1953년 사이에 신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쳤고. 1953년에 시카고 대학에서 교수로 있다가 예일 대학에서 스털링 교수로 임명되어 25년 가까이 활동하다가 1996년에 은퇴했다. "거대한 기획의 산물이자 가장 중요한 저술인 그리스도교 전통의 역사를 다섯 권으로 펴냈다." 이것은 앞서 말한 바 있다. 가장 중요한 책은 무엇인가. 《The Christian Tradition: A History of the Development of Doctrine》이고, 다른 하나가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전통을 옹호하다》 그리고 교리사라고 할 수 있다. 일단 이 정도만 해도 더 이상 거론할 필요가 없는 석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학자는 자기가 publish한 책으로 말하는 것이다. 탁월한 책을 쓰는 것이 학자가 하는 일이다. 텍스트라고 하는 것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고정된 물성과 유동적인 매체가 가지고 있는 일종의 물성의 차이가 있고, 어쨌든 저는 텍스트를 배경으로 해서 성장해온 사람이고, 그런 것 위에서 뭔가 작업을 계속해왔기 때문에 그것을 버려서는 안 된다.
"야로슬라프 펠리칸에 관하여"를 보면 역사가의 과제라는 부분이 있는데, 중요한 부분이다. 기본적으로 역사철학과 역사신학은 다르다. 역사신학은 신학을 역사적인 맥락 속에서 신학을 검토하는 것으로, continuity, 지속되고 있는 것은 무엇이고, change, 변화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를 따져 묻는 게 역사신학자들이라면, 역사철학자들은 역사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과연 역사가 우리가 탐구해 볼 만한 어떤 가치 있는 대상인가를 따져 묻는다. 그러면 철학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가를 따져 묻는 것은 철학사가가 하는 일이다. 모든 철학자들이 철학사에 관심을 갖고 있는 건 아니다. 저는 조금은 관심을 갖고 있고, 그래서 철학사 책도 공역을 한 바도 있다. 그런데 역사 자체에 대한 더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그래서 역사 자체를 깊이 있게 공부하면서 그것이 얼마나 의미 있는가, 과거의 일들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일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지속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가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다. 펠리칸이 역사신학을 한다고 할 때 신학이 역사적인 맥락 속에서 어떻게 변천되었고, 신학은 불변의 신에 대해서 연구하는 것이지만, 그 불변의 신에 대한 인간의 연구는 끝없이 변화한다. 그렇기 때문에 펠리칸이 제시하는 "역사가의 과제"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우리가 어떻게 해서 과거를 아는가. 역사가를 통해서 과거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전해지고 그리고 이 과거에 독자들이 정신과 마음을 열도록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자극을 주는 사람 이 사람이 역사가이다.
지난 시간에 얘기했던 것처럼 칼 바르트는 조직 신학자가 되기로 결심한 바로 그 순간 위대한 교리사가가 될 수 있던 기회를 버렸다고 얘기했다. 바르트도 그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능력 중에 가장 중요한 능력은 바로 "다중 언어" 능력이다. 역사가는 다중 언어를 사용한다. historian as polyglot, 다중 언어 사용자로서의 역사가. 그런데 여기서 다중 언어라고 하면 구사할 줄 아는 언어가 굉장히 많다 라는 뜻이기도 하겠지만, 예를 들어서 움베르토 에코 같은 사람들이 대표적인 사람이다, 그런데 꼭 그런 의미만은 아니다. 역사가는 라틴어, 중세 영어, 고대 노르드어 같은 다른 언어를 익혀야 할 뿐만 아니라 이건 기본이다. 다중 언어 능력이라고 하는 것은 꼭 그렇게 언어를 익힌다 라는 의미에서만 아니라 다른 시대와 대화하는 그런 능력이다. 그 시대의 맥락 속으로 들어갈 줄 아는 힘, 그런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역사가이다. 감사관auditor은 이전의 사람들과 견주어 우리가 얼마나 멀리 왔는지를 설명하는데 그냥 단순한 설명으로 그친다. 그러나 역사가는 언어를 익혀야 할 뿐만 아니라 다른 시대와 대화하도록 해준다. 대화하도록 해준다는 것은 번역해서 우리에게 알려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무엇보다도 전통을 다루는 것이다.
펠리칸의 말 중에 명언들이 많은데, 그 중에 아주 유명한 명언이 바로 이것이다. "전통은 죽은 이들의 살아있는 신앙이고, 전통주의는 살아있는 이들의 죽은 신앙이다." 이 말은 챕터4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때 가서 다시 얘기하려고 하니 그냥 그대로 두고, 죽은 이들이라는 것은 과거의 사람들을 말한다. 과거의 사람들이 살아있는 동안에 굉장히 고투하면서 만들어 내놓은 어떤 신앙 또는 사상 체계 이런 것들을 우리가 전통이라고 말할 수 있고, 그것을 그 당시에 살았던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그것을 다듬고 형성해냈는가를 따져 묻는 게 역사가들이다. 여전히 생동적으로 따져 묻는 것이 역사가인데, 그렇게 따져 물을 것 없이 그냥 그대로 외우기만 하면 된다, 그건 절대 고쳐서는 안 된다 라고 말하게 되면 전통주의이다. 오늘날 살아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딱 붙들고 앉아서 절대로 고칠 수 없다 라고 말해버리면 그것은 죽은 신앙이 된다. 도덕과 도덕주의의 차이다. 도덕적인 사람은 과거에 통용되던 도덕들을 살펴보고 그것이 어떤 맥락에서 그런 도덕이 성립하였는가를 생각한 다음에, 상황 맥락을 항상 따져묻고 그러고 있다가 그것을 오늘날의 상황 맥락 속에 가져다가 그것을 대화하게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여전히 지속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를 따져 묻는다. 그런데 도덕주의자들은 그런 것을 따져 묻지 않고 생동적 상황 맥락 따위는 다 폐기해버리고, 그때 성립했던 어떤 일종의 규칙 · 규범 또는 카논 이런 것들을 금과옥조처럼 고칠 수 없다 하고 지켜 나가는 것이 바로 도덕주의이다. 전통과 전통주의의 차이점은 도덕과 도덕주의의 차이점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펠리칸이 쓴 책 중에 역저 중에 역저인 《The Christian Tradition》을 보면 첫째 권의 제 1페이지에 아주 멋진 문장이 있다.
what the church of Jesus Christ believes, teaches and confesses on the basis of the word of God: this is Christian doctrine. Doctrine is not the only, not even the primary, activity of the church. The church worships God and serves mankind, it works for the transformation of this world and awaits the consummation of its hope in the next. "Faith, hope, love abide, these three; but the greatest of these is love"—love, and not faith, and certainly not doctrine.
what the church of Jesus Christ believes, teaches and confesses,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것 믿고 가르치고 고백하는 것, on the basis of the word of God, 하느님의 말씀을 바탕으로는 성서를 말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바탕으로 믿고, 가르치고, 고백하는 것, 이것은 성서에 있는 것을 그대로 믿고 그대로 가르치고 그대로 고백한다는 뜻은 아니다. 성서에 기록된 바가 있는데 그 기록된 바를 바탕으로 해서 해석을 하고 상황 맥락 속에서 가르치고 그다음에 고백하는 것이 바로 this is Christian doctrine, 기독교 교리다. 교리라는 말도 전통이라는 말과 같이 얘기할 수 있다. 지금 여기서 중요한 개념이 교리와 전통, 전례와 전통이라고 되어 있는데 전통은 교리라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쓰일 수 있다. 그래서 Doctrine is not the only, not even the primary, activity of the church, 교리는 교회가 행하는 유일한 그리고 중요한 주요한 활동이 아니다. 교회라고 하는 것은 그냥 가르침만을 전하는 학교가 아니다. 하느님을 찬미하고 인류를 섬기며 이 세계를 변화시키고 다가올 세계를 향한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공동체이다. 교회ecclesia는 원래 공동체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Jesus Christ believes, teaches and confesses하는 것을 우리는 전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전례와 전통이라고 할 때 전통이라고 하는 말을 교리라는 말의 다른 뜻으로 이해를 한다면, 교리와 전례 이 두 가지가 서로 맞물리면서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전통[교리]은 신앙고백 문서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여기 이 책에서 전통을 옹호하다 그러면 교리를 옹호하다 라고 될 수도 있는데, 사실 넓게 보면 전례까지도 결합된, 교리와 전례가 결합된 그것이 더 넓은 의미에서의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전통의 역사와 교리의 역사는 다르고 전례가 가리키는 바에 주목을 해야 된다. 어떻게 믿었는가, 어떤 텍스트가 있는데 그걸 어떻게 믿었는가. 가령 성서 텍스트가 있는데 그 성서 텍스트가 조선시대 말에 한국에 들어와서 가령 천주교 순교자들은 어떻게 믿었는가. 서구에서는 어떻게 믿었는가, 그다음에 조선에서는 어떻게 믿었는가 what believes, 그리고 어떻게 믿도록 가르쳤는가 what teaches, 어떻게 그것을 믿고 배워서 어떻게 자기의 신앙을 고백했는가, 이런 것들이 전례 안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신학의 역사만 쓴다고 하면 신학자들의 역할이 중요하겠다. 철학의 역사는 대체로 그렇게 되어 있다. 철학사는 철학자들의 역할에 큰 중요성을 부여해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학자들 얘기만 쭉 있다. 그러면 그것이 철학사이다. 그러면 철학이 사회 속에서 사람들과 어떻게 커뮤니케이션하고, 무엇을 가르쳤고, 그 철학을 배운 사람들이 어떤 철학적 활동을 했는가 이런 것들은 사실 철학사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저는 사상사라고 하는 좀 더 넓은 범위로 가야 되지 않나 그런 생각을 사상사 연구자로서 늘 해본다. 예를 들어서 명시적으로 한국 사람들의 20%는 기독교도이다. 그런데 철학 공부하는 사람들은 기독교 공부 안 한다. 한국 사람들의 생각 속에 기독교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철학적으로 따져 묻을 수가 없다. 한국 사람들은 샤머니즘이 있다. 한국 무교, 그런데 그것도 미신이라고 해버린다. 불교 신자도 많다. 적어도 불교와 기독교를 합해서 40%는 된다. 기본적으로 성서 텍스트가 어떠한지 그리고 그런 것이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런 것들을 봐야만 한다. 신학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신학 공부를 한다고 하면 위대한 신학자들 슐라이어마허도 읽고, 칼 바르트도 읽고,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도 읽고 하는, Key Theological Thinkers를 다 읽으면 신학 공부가 끝나는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 교리의 역사라고 하는 것은 신학자들이 반드시 주목해서 봐야 하는 그리스도교 전통의 측면들, 즉 전례들에 주목을 해서 각 시기의 중심 주제들이 그리스도교의 전통이라는 거대한 서사 속에서 어떠한 구조를 형성했는가를 반드시 살펴봐야 한다.
가령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교리 중에 하나가 삼위일체론이다. 삼위일체론은 예수 당시에는 논의가 안 되었다. 물론 성서에 희미한 흔적이 있지만 그건 나중에 그것을 발견해서 정교하게 articulation을 한 것이다. 그러니까 삼위일체론이라고 하는 것은 적어도 AD300~400년 이전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이 문제가 된 것은 콘스탄티누스 1세가 니카이아 공의회를 하면서부터라고 볼 수도 있다. 그게 문제가 안 되엇으면 아레이오스나 아타나시오스와 같은 사람들끼리 치고받고 싸우고 알렉산드리아 학파나 안티오키아 학파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끝났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초기 기독교에서는 사도 파울로스나 이런 사람들에게서는 삼위일체가 중요한 주제가 아니었을 수 있다는 얘기이다. 유대교에서는 삼위일체론이라는 게 있을 수 없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이 각 시기의 중심 주제들이 있다. 그 중심 주제들이 어떤 구조를 형성했는가, 그 구조를 형성하는데 전통이라는 서사 속에서, 말하자면 정합적으로 맞아 들어갈 때 그렇게 되겠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교리라고 하는 것은 정제된 형태의 신조가 아니다. 신앙과 예배, 설교와 가르침, 토론과 대화, 논쟁과 결론 이런 것들의 상호작용에서 나온 교회의 가르침과 교리를 바탕으로 한 서사, 이런 것들 전체를 다 아울러서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 교회의 유일한 활동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The Christian Tradition》 1권 1페이지에 나와 있는 내용에 이어지는 부분을 보면, Doctrine is not the only, not even the primary, activity of the church, 교리는 교회의 유일한 활동이 아니고 심지어 주요한 활동도 아니다. The church worships God and serves mankind, it works for the transformation of this world and awaits the consummation of its hope in the next. 교회는 하느님을 예배하고 인류를 섬기며 이 세계를 변형시키고 다가올 세계를 향한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린다. "Faith, hope, love abide, these three; but the greatest of these is love"—love, and not faith, and certainly not doctrine.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세 가지가 가장 중요하고, 그런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그 교리가 아니다. 투철한 신학적인 어떤 지식이 있으면 믿음이 끝나는가,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런 교리는 문자인데, 그러한 문자가 전례를 통해서 그러니까 예배를 통해서 그다음에 공동체 안에서 믿는 이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서 살아 숨쉬는 신앙이 되는 것이고, 명료하고 정교하게 표현된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나오는 아주 중요한 원칙이 하나 있다. "기도의 법이 신앙의 법을 형성한다." lex orandi lex credendi라는 말이 성립하게 된다. 기도의 법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믿음의 실행이고,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교리의 내용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신앙이 먼저가 아니라, 그 신앙이 먼저 있는데 그건 필요 조건으로 있다,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예배 설교와 가르침, 토론과 대화 논쟁 이런 것들을 하다 보면 그게 다시 거꾸로 피드백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까 어떤 전통이 형성되는 곳이 어디인지를 찾아볼 수 있으려면 전례를 찾아봐야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배, 기도, 찬양이 참된 신앙의 물음을 빚어낸다. 이렇게까지 해놓으면 우리가 이제 기독교의 역사라고 하면 단순한 신학의 역사만을 따져 물을 수는 없다. 단순히 신학만 따져서 물으면 기독교 역사가 아니라 그건 그냥 신학사이다.
전례를 공부하려고 하다 보면 주변의 것을 많이 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다중언어polyglot라고 하는 것, 다중 언어 구사자로서의 역사가라고 하는 것은, 이 다중 언어라는 말 안에 다양한 영역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까 《From Luther to Kierkegaard》, 루터에서 키에르케고어까지, 루터와 키에르케고어를 시작과 끝으로 두었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다. 왜 루터와 키에르케고어일까. 키에르케고어는 신 앞에서 단독자를 얘기한다. 루터도 마찬가지 신 앞에서 단독자이다. 어떻게 보면 공동체를 떠난 기독교도이다. 마음속에서 나 혼자 신을 만난다는 것이 루터의 얘기이다. 그러니까 원칙적으로만 보면 루터파 교회가 내세운 하나의 그 신앙의 법에 따르면, 루터파 교회라고 하는 것은 전례를 완전히 삭제해버린 교회라고도 할 수 있다. 기도는 골방에서 혼자서 하면 된다. 어떤 식으로 기도를 하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런 것들은 공동체에서 가르치는 일도 없다. 키에르케고어도 그런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루터에서 키에르케고어까지는 그런 의미가 있을 것이고, 그다음에 《What Has Athens to Do with Jerusalem?》 아테네는 예루살렘과 어떠한 관련이 있는가, 원래 테르툴리아누스가 쓴 책이다. 희랍 철학과 기독교 신학의 관계, 희랍 철학은 정교한 철학적 물음인데 기독교 신앙은 믿음이다. 그러니까 이해를 통한 신앙과 같은 것을 하면 안 된다는 얘기가 테르툴리아누스인데, 테르툴리아누스는 사실 삼위일체론에서 굉장히 중요한 Trinitas라는 개념을 내놓은 사람이니까, 이 논제는 헬라스 철학과 기독교 신학의 관계 문제를 다룰 때 아주 전형적으로 물어지는 것이다. 펠리칸의 독창적인 고유한 제목은 아니다. 그러나 이 주제에 덤벼들었다는 것은 보통 자신감이 없으면, 아주 오랫동안 제기되었던 이 물음을 자기 책 제목으로 썼다는 것은 이미 한 바닥을 봤다는 얘기이다. 무수히 많은 석학들이 붙들고 씨름했던 문제인데 여기에다가 내가 뭔가 얘기를 해보겠다고 하는 것은 웬만한 자신감 가지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다음에 《Bach Among the Theologians》, 신학자들 사이에서의 바흐. 그리스도교 전통과 음악의 관계. 바흐는 개신교 루터파 교회에서 궁정 음악가로 일했다. 그리고 앞서 나왔던 칼 바르트는 모차르트에 관한 엄청나게 탁월한 연구자이기도 하다. 칼 바르트와 모차르트는 굉장히 대단한 그 주제가 있다. 관심 있는 분들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라고 칼 바르트가 쓴 책이 있다. 그다음에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해서 연구한 《The Mystery of Continuity》, 연속성의 신비, 서구 전통의 역사라는 책이 있다. 그 다음에 《The Excellent Empire》, 훌륭한 제국, 서구 전통의 역사 이해도 마찬가지이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를 펠리칸은 어렸을 때부터 많이 읽었다고 한다. 어렸을 때 역사책을 많이 읽으면 역사가가 되는 것 같다. 그다음에 《Imago Dei》, 하느님의 형상, 정교회의 시각 예술에 대해서 다룬 것이고, 그다음에 제가 처음으로 펠리칸을 알게 되었던 《Eternal Feminines》, 단테 《신곡》에 나타나는, Three Theological Allegories in Dante's Paradiso, 단테 천국편에 세 개의 신학적 알레고리, 굉장히 좋은 책이다. 그다음에 《Luther The Expositor》, 해설자 루터, 루터의 성서 주석을 소개한 것인데 제일 처음으로 나온 책이다. 그다음에 《Obedient Rebels》, 순종하는 반란자들. 종교개혁 시대의 신학. 부제가 카톨릭 실체와 프로테스탄트 원리, Catholic substance and Protestant principle in Luther's Reformation이다. 그러니까 종교개혁 시대의 신학이라고 하는 것인, Obedient Rebels, 반란자들인데 순종한다는 말이 서로 형용모순이다. 여기서는 실체적인 부분은 가톨릭인데 프로테스탄트는 거기에서 어떤 원리들을 제시하고 있는가 그런 것들을 다루고 있다.
그다음에 《예수, 역사와 만나다》, 《마리아, 역사와 만나다》. 문화사에서 마리아가 차지하는 위치, 그다음에 《성서, 역사와 만나다》는 Whose Bible Is It으로 되어 있다. 한국어판 제목은 역사와 만나다로 되어 있는데, Jesus Through the Centuries와 Mary Through the Centuries는 제목이 같은데, Whose Bible Is It을 직역해보면 누구의 성서인가이다. 성서 특히 구약 성서 같은 경우는 꼭 기독교도들만의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유대인도 관련이 되어 있고, 무슬림도 관련이 되어 있다. 간단히 말하면 책의 백성들이다. 흔히 하는 말로 책의 백성들이라고 알려진 사람들에 대해서까지 얘기한다. 그러니까 교회 일치 관점이라고 하는 것, 개신교 그다음에 가톨릭, 동방정교회 이런 것들을 다 아우른다. 《성서, 역사와 만나다Whose Bible Is It? A History of the Scriptures Through the Ages》은 2005년에 나온 것인데, 이 무렵부터 펠리칸은 개종을 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카파도키아 교부들에 관한 책을 출간하고 5년 뒤, 펠리칸은 정교회 신자가 되었다." 카파도키아 교부들은 동방정교회 성인들이다. 그 사람들은 삼위일체 교리를 완성한 사람들이다. 5년 뒤에 종교의 신자가 되고 그리고 3년 뒤에 정교회 신자로서 눈을 감았다. 이제 이 의미를 보면 하르낙은 "(8세기 이후) 그리스 교회에서 교리의 역사는 끝났다. 그 역사가 다시 일어날 거라 상상하기 어렵다."라고 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하르낙은 동방 그리스도교의 정신에 관한 논의는 안 한 것이다. 펠리칸이 카파도키아 교부들의 작업을 집중적으로 다룬 것이 《Christianity and Classical Culture》인데, 1993년에 나왔다. 아돌프 폰 하르낙은 이 정도까지는 안 했다. 그래서 저는 하르낙을 더 이상 읽지 않는다. 그리고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그 로마 제국이 서로마 제국이다. 동로마 제국에 대해서는 기번이 얘기를 한 바가 없다. "(동방 그리스도교인들은) 신성한 유산을 창조하고 발전시킨 정신을 물려받지 못한 채 생명이 없는 손으로 조상들의 부를 쥐고 있다." 그러니까 조상들이 남겨놓은 유산을 까먹으면서 대충 살고 있다 라는 식으로 기번은 얘기했다. 에드워드 기번 같은 경우도 서로마 제국이 쇠망하면서 로마 제국이 가지고 있는 생동성이 소멸되었다고 보는데 이건 동방기독교에 대한 서구 역사가들의 편견이다. 하르낙도 그렇고 기번도 그렇고, 그런데 동방기독교에 대한 편견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동로마 제국에 대한 편견이기도 하다. 저는 비잔틴 제국이 그렇게까지 어이없는 평가를 받아야 되는 게 참 어이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Christianity and Classical Culture》라고 하는 것이 펠리칸으로 하여금 정교회 신자로 개종을 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였을 것이다.
《기독교와 고전문화Christianity and Classical Culture》는 1992년 애버딘 대학에서 전개된 기포드 강연 렉처에서 나온 얘기로 카파도키아 교부들을 다룬 텍스트이다. 이 텍스트의 목차를 보면 파트1, 파트2로 되어 있는데 각각 10개의 챕터로 이루어져 있다.
Part One Natural Theology as Apologetics 1. Classical Culture and Christian Theology 2. Natural Theology as Apologetics 3. The Language of Negation 4. God and the Ways of Knowing 5. The Many and the One 6. The Universe as Cosmos 7. Space, Time, and Deity 8. The Image of God 9. The Source of All Good 10. From Tyche to Telos |
PART Two Natural Theology as Presupposition 11. Christian Theology and Classical Culture 12. Natural Theology as Presupposition 13. The Lexicon of Transcendence 14. Faith as the Fulfillment of Reason 15. The One and the Three 16. Cosmos as Contingent Creation 17. The Economy of Salvation 18. The Metamorphosis of Human Nature 19. The Worship Offered by Rational Creatures 20. The Life of the Aeon to Come |
왼쪽 파트 1은 Natural Theology as Apologetics, 변증으로서의 자연신학이고, 오른쪽 파트2는 Natural Theology as Presupposition, 전제로서의 자연신학, 그러니까 하느님에 대한 신학, 신학의 전제가 되는 것, 그러니까 기독교 신학에서는 그렇다는 것이다. 자연신학이라고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도전인데, 자연 신학은 희랍적인 신학이다. 이 얘기는 여기서 자세하게 할 건 아니고 목차의 내용이 이런 것이다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만큼만 말하면, 왼쪽에 있는 파트1이 헬레니즘 고전 문화이고, 오른쪽에 있는 것이 기독교 문화이다. 그러니까 챕터1은 Classical Culture and Christian Theology, 고전 문화와 기독교 신학 그다음에 챕터 11은 Christian Theology and Classical Culture, 기독교 신학과 고전 문화, 이렇게 제목이 이렇게 바뀌었다. 그러니까 기독교 신학은 고전 문화를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하는 부분들이다. 파트 1의 챕터3을 보면 The Language of Negation, 부정 언어가 있다. 이 부정 언어들을 통해서 궁극적인 실제로서의 신을 이야기할 때는, 적극적인 표현을 할 수 없으니까, 이건 아니고 이건 아니고 해서 표현하는, 부정의 길이라고 하는 것은 위 디오니시우스, 이제 정교의 신학으로 가는 것이다. 그다음에 챕터5를 보면 The Many and the One, 다와 일, 희랍 철학에서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그것이 챕터15를 보면 The One and the Three, 일과 셋, 삼위일체론, 그리고 챕터6을 보면 The Universe as Cosmos, 질서 잡힌 것으로서의 우주, 그런데 챕터16을 보면 Cosmos as Contingent Creation, 우연적 창조로서의 우주, 신의 창조론이 강조되고, 그다음에 챕터7은 Space, Time, and Deity, 공간, 시간 그리고 신성한 것, 그런데 챕터17을 보면 The Economy of Salvation, 구원의 경륜, 구원의 과정 이런 얘기이다. 그다음에 The Image of God, 신의 형상 그다음에 The Metamorphosis of Human Nature, 인간 본성의 변신, 인간이 어떻게 신적인 존재로 변화되어 가는가, 이게 기독교가 하는 일이고, 그다음에 챕터 10을 From Tyche to Telos, Tyche는 우연적인 것, 우연적인 운명에서 목적론으로, 챕터20은 The Life of the Aeon to Come, Aeon은 우주의 제일 원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신플라톤주의나 이런 데서도 나오는 말이고, 헤겔의 형이상학에 보면 이 개념이 자주 나온다. 어쨌든 이것은 거울 구조로 기독교와 헬레니즘의 상호 대조를 통해서 자연 신학이 어떻게 변모되었고 그것이 기독교에서 어떤 바탕을 이루었는가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 카파도키아 교부들의 작업을 집중적으로 다룬 것이고 그 과정을 통해서 카파도키아 교부들은 삼위일체론을 만든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논의를 해보면 하르낙은 굉장히 단순하게 고전 문화와 기독교 신학을 연결시켰다. 복음이라는 토대가 있고 그 위에 그리스 정신이 덧입혀졌다. 그렇게 해서 기독교 교리가 나왔다. 이 정도까지만 가도 대단한 통찰인데 이제 이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펠리칸은 그 둘이 만나면서, 그러니까 그리스 정신과 고전 문화와 기독교 신학, 기독교의 복음이 만나면서 세계가 transformation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헬레니즘의 자원들은 무엇인가. 의례가 있고 신과 관련된 이야기를 가진 헬레니즘의 전통 종교들이 있다. 이런 종교들이 있는 과정에서, 플라톤의 철학을 보면 소크라테스가 믿는 신이 당시 아테나의 사람들이 믿는 신과 다르다고 말한다. 그 얘기는 아테나이의 전통 종교가 사람들을 똑바로 살게 해주는 것 같지 않으니까 플라톤 또는 소크라테스가 이렇게 하면 안 된다 해서 해독제로 등장한 것이 소크라테스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헬레니즘 세계에 그 두 가지의 긴장이 이미 있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놓쳐서는 안 된다. 동시에 그리스 교부들, 그러니까 대표적으로 보면 카파도키아의 교부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바실레이오스, 바실레이오스와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형제이다, 그 사람들은 철학자이면서 동시에 사제이고, 설교가, 가르치는 사람이기도 했고, 다시 말해서 이론으로서의 신학과 실천[전례]가 분리되지 않은 사람들이고, 펠리칸은 그것에 주목을 했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melody of theology, "신학의 선율"이 등장했다. 선율이라고 하는 말은 서로 논리적으로는 결합되기 어려운 것들이 서로 파고들면서 서로에게 영향을 미쳐서 제3의 뭔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율동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melody of theology, 이 개념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예전에 헤겔 책만 읽을 때는 이해를 잘 못했다. 헤겔 책을 보면 변증법적 율동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런데 이 melody라는 말이 그 뒤로도 이런저런 책들이 나온다. 대표적으로 지금 얘기하는 펠리칸에서 나온다. 또는 spiel이라는 말도 있다. 유동으로 번역이 된다. 《유리알 유희》에서는 유희라는 말로 번역된다. 율동, 선율 다 같은 맥락 속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얘기이다.
이제 펠리칸은 이렇게 얘기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제자는 '신학의 선율'을 기도의 법[전례]이 신학의 법[신학]을 세워야 한다는 공식으로 만들었다." 그러니까 율동, 즉 melody, 서로의 변증법적 통합 또는 융합 이런 것들을 통해서 단순히 신앙만 가지고는 안 되는,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삼위일체 교리라는 것은 카파도키아 교부들의 작업을 통해서 삼위일체 교리가 뚜렷하게 성립이 되었는데, 이 삼위일체 교리라고 하는 게 바로 이런 신학의 율동을 통해서 나온 것이다. 신약성서에는 삼위일체 교리가 없다. 그러니까 신약성서만 가지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삼위일체는 고백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들이 기독교는 성서에 없는 얘기를 가르치더라 라고 말하면 어이가 없는 것이다. 신앙은 그렇게 성립하지 않는다. 기도의 법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다. 삼위일체 교리라고 하는 것은 신약성서와 예배의 저변에 있는 근본 흐름에 충실하기 위해 교회가 어떻게 말을 해야 되는가,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 what the church of Jesus Christ believes, teaches and confesses, 말의 방식이라고 하는 게 가르치고 고백하는 방식이다. 유일신론을 보존해야 한다면, 삼위일체 교리는 신앙의 법이 기도의 법에 순종하면서 신학의 선율을 조화롭게 노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유대교처럼 갈 수는 없다. 기독교가 직면한 가장 큰 두 개의 전선이 있는데 하나가 유대교이다. 기독교는 유일신교인데 예수가 나타나버렸다. 이것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서 나온 것이 삼위일체 교리이다. 그다음에 무로부터의 창조에서 나온 것이 자연 신학, 그러니까 헬라스 전통과의 대결 속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어쨌든 이런 얘기들은 좀 더 자세하게 논의를 해야 되겠지만 적어도 펠리칸이 직면했던 여러 가지 논의들, 주제들이었다는 것을 알아 두는 게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이제 다음부터는 챕터 1부터 읽어 나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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