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강유원의 미학, 예술학, 예술철학 8-2
- 강의노트/책담화冊談話 2021-25
- 2023. 11. 6.
강유원의 책담화冊談話(https://booklistalk.podbean.com)에서 제공하는 「강유원의 미학, 예술학, 예술철학」을 듣고 정리한다. 2023.09.06~2023.11.15 수원시글로벌평생학습관에서 진행되는 강의이다.
2023.11.01 🎤 미학, 예술학, 예술철학 8-2
커리큘럼
09.06 예술의 목적과 예술론의 학적 위치
09.13 플라톤의 미학
09.20 예술론의 전범으로서의 《향연》
10.04 mimēsis
10.11 신플라톤주의와 고전주의 예술론
10.18 maniera grande, cicerone
10.25 Baroque, Rococo
11.01 헤겔과 역사적 예술론
11.08 미술사의 여러 갈래들(1):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조르조 바사리
11.15 미술사의 여러 갈래들(2): 에르빈 파노프스키, 막스 드보르작
교재
강유원(지음), 《에로스를 찾아서 - 사랑과 아름다움에 관한 성찰》
제8강. 헤겔과 역사적 예술론
일시: 2023. 11. 01. 오후 7시 30분-9시 30분
장소: 수원시글로벌평생학습관
강의 안내: https://learning.suwon.go.kr/lmth/01_lecture01_view.asp?idx=3345
책 130페이지를 보면 헤겔의 《예술 철학 강의》가 있는데, 주해 43번을 보자. "헤겔은 아름다움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앞서서 얘기한 것이 바로크에 대한 어떤 일반적인 규정이고 그다음에 거기에 얽혀 있는 여러 가지 예술 장르라든가 그런 것들과 관련된 것이다. "1) 미 일반, 2)보편적 미의 특수화, 이 특수화는 미가 예술미로 특수하기 때문에 생겨나거니와, 예술미는 다시 말해서 비로소 본래적인 미이며, 보편적으로 이념상 일반이다." 여기 나와 있는 것은 그냥 일단 지나가고, "미일반은 이념으로서만 존재하는 추상적인 것이며, 그것이 구체적 시공간에 특화될 때 나타나는 것이 예술미(kunstschöne)이다." 이념이라고 하는 것은 아름다움에 대한 막연한 어떤 감각이 있다는 것이다. 헤겔은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사람들은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대체로 합의는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것이 "구체적인 시공간에 특수화될 때"에 밑줄을 치고, 이게 바로 시대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술미만이 본래적인 의미에서 아름다움이라 할 수 있는, 인간의 정신이 산출한 것, 구체적인 형태를 얻어서 미적인 것으로 규정된 것이며, 이는 이념적인 것의 구체화"라고 되어있다. 예술미는 무엇인가. 헤겔이 여기서 말하는 예술미는 영원한 아름다움 그런 것이 아니라 Baroque적인 아름다움, 인간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한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그다음에 "인간의 정신이 산출하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은 공동체에서 생활하며, 그런 까닭에 인간의 정신이 산출한 예술 작품은 역사적 공동체적 행위의 산물이다." 그러면 가령 우리가 예술 작품이다 라고 하면 바사리의 규정에 따라서 대체로 천재의 작품이다 라고 얘기했다. 그것이 헤겔로 오면 완전히 깨진다. 천재라고 하는 것은 시대가 낳아 놓는 것이다. 즉 예술 작품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예술가가 있는데 그 예술가가 살아간 시대가 있고 그다음에 그 예술가가 그 시대에 활용할 수 있는 재료가 있고 그다음에 그 예술가가 그 시대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하나의 시대의 정신이 있다. 그런 것들을 구체화해서 내놓으면 그게 바로 예술 작품이다 라는 얘기다. 다시 말해서 예술 작품이라고 하는 것은 역사적 공동체적 행위의 산물이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술이라는 건, 이제 예술가가 있다. 그러면 이 예술가가 그 시대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로서 그다음에 그 시대에서 그가 얻을 수 있는 이념으로서 또는 그 시대의 창작 기술을 총합으로 해서 예술 작품이 되었다.
《에로스를 찾아서》 주해 43
헤겔은 아름다움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1) 미 일반, 2)보편적 미의 특수화, 이 특수화는 미가 예술미로 특수하기 때문에 생겨나거니와, 예술미는 다시 말해서 비로소 본래적인 미이며, 보편적으로 이념상 일반이다."(《예술철학 강의》, S. 41) "미일반"은 이념으로서만 존재하는 추상적인 것이며, 그것이 구체적 시공간에 특화될 때 나타나는 것이 "예술미"(kunstschöne)이다. 예술미만이 본래적인 의미에서 아름다움이라 할 수 있는, 인간의 정신이 산출한 것, 구체적인 형태를 얻어서 미적인 것으로 규정된 것이며, 이는 이념적인 것의 구체화, 즉 "이념상"이라 불린다. 예술미는 무엇보다도 인간의 정신이 산출한 것이다. 인간의 정신이 산출하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은 공동체에서 생활하며, 그런 까닭에 인간의 정신이 산출한 예술 작품은 역사적 공동체적 행위의 산물이다. 헤겔이 예술미를 이렇게 규정하는 것은 예술작품을 전적으로 주관적인, 몰역사적 탈역사적 천재의 산물로 규정하는 것에서 벗어나, 그것을 역사적 맥락에 정위定位하기 위함이다. 헤겔은 자신의 체계에서는 예술을 종교 및 철학과 더불어 절대적 정신의 현현태로 규정하므로, 체계에서 보면 예술은 영원한 진리의 한 계기에 지나지 않으나 체계에서 벗어난다면 예술은 역사적 산물이 된다.
예술작품을 창작했다. 창작은 도이치어로 Schöpfung이라고 하고, 영어로는 creation이다. Schöpfung이라는 단어는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린다 라는 뜻이 있다. 예술가가 재료와 이념과 기술을 해서 예술작품을 길어 올린다는, 물을 길어 올렸는데 우리가 마실 수 있는 것이 된다. 다시 말해서 길어올림의 과정을 거치면서 이것이 Kunstwerk가 되면 성질의 전환이 일어난다. 재료와 이념과 기술이 결합이 되어서 Kunstwerk가 나왔다. 그런데 Kunstwerk는 그걸 잘게 쪼개면 다시 재료와 이념과 기술로 환원이 되지 않는다. 헤겔쯤 오면 Kunstwerk는 꼭 예술 작품이라고 얘기하지 않고 인공물이라고 얘기해도 된다. 아주 당연하게도 Kunstwerk가 역사적인 산물인데 역사의 소재로 환원되지 않는 불가역적인 것이다. 불가역적 산물이 되는 불가역적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역사적인 행위의 산물이라고 해서 하찮은 것은 아니다. 상전이相轉移가 일어나서 불가역적인 어떤 성질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또는 감상자에게 그 순간에 어떤 일회적인 기쁨을 줄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인 것으로 쉽사리 환원시킬 수 없는 그 무엇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술작품은 "역사적 공동체적 행위의 산물"이기는 해도 그것이 어떤 역사적인 순간으로 환원되지 않는 불가역적인 것이고, 그것 자체로 상전이가 일어나서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역사적 예술론이라고 해서 예술작품에 대해서 하찮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심지어 그 안에서 하나의 또 다른 의미를 획득하게 되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이제 감상자에게도 그렇고, 그것 자체로 자기완결성을 여기서 갖추게 된다.
여기서 인간의 정신이 산출한 예술작품은 "역사적 공동체적 행위의 산물"이라고 말했는데, 여기서 Kunstwerk를 예술 작품이라고 말했는데, 예술작품은 다시 말해서 인공물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고 얘기했다. 또 다른 것이 하나가 있다. Kunstwerk라고 하는 말은 또다른 무엇을 가리킬 수도 있다. 역사적 공동체적 행위의 산물이라고 하는 말로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정치체이다. 정치체, 정치 체제는 역사적 공동체적 행위의 산물이다. 한 번 겪으면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헤겔의 예술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정치철학에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누구는 그게 아니라고는 얘기하지만 저는 그렇다고 보는 데, 헤겔은 본인이 직접 겪은 건 아니라 해도 프랑스혁명을 겪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 당시 프로이센에서 프랑스혁명의 자유 정신에 대해서 굉장히 깊이 생각을 했다. 프로이센의 낭만주의자들은, 괴테나 이런 사람들, 헤겔은 괴테와 동시대인이다, 프랑스혁명의 자유 정신 이런 것에 대해서 많이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정치 체제도 인공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술철학이라고 하는 것이 Quattrocento 시기의 예술철학 개념이라고 하는 것을 벗어나서 Baroque 시대로 넘어가고, 역사적 예술철학으로 넘어간다. 그러면 이 얘기가 모두 공동체의 행위를 설명하는 그런 이론으로 전환이 된다. 이게 역사철학도 그렇고 예술철학도 그렇고 굉장히 중요하다. 다음 주부터 배우게 되는 인공물의 의미, 현상의미 이런 것들은 현대 기호학에서 나오는 얘기인데, 우리나라에서는 기호학 같은 것을 얘기할 때 그것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인 의미들을 다 빼고 얘기하는데, 원래는 앙리 4세, 루벤스 이런 사람들이 다 당시의 정치적인 행위들로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 사람들이 가톨릭을 선택하느냐 프로테스탄트를 선택하느냐 하는 것이 정치적 행위이다. 그런 것들이 정치적 행위였기 때문에 그것들이 프랑스혁명 이전부터 모두 하나의 정치 사상으로서 개입이 된다. 기호학이나 이런 것들이 정치적 의미를 갖게 된다. 헤겔은 그것에 대해서 지나치게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는 않지만 오늘날에는 순정한 의미에서의 예술철학이라고 하는 것들은 사실상 성립하지 않는다. 그리고 예술이라고 하는 것이 지나치게 인공물과 정치체와 연결이 되면 예술이라고 하는 것이 도대체 어디에 서 있어야 되는가에 대해서도 문제가 될 수 있다. 순수한 의미에서 예술이라고 하는 것이 없어지고 있다는 우려도 있을 수 있다. 그러니까 사실 역사적 예술론이라고 하는 것은 예술작품을 이해하는 데 굉장히 중요한 상황이라든가 시대라든가 이런 맥락을 읽는 데 굉장히 도움이 되긴 하는데, 사실 예술작품을 그냥 시대적 산물로 던져버리면 예술작품이라고 하는 것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징들을 잃어버릴 위험도 있다.
그다음 문장 "헤겔이 예술미를 이렇게 규정하는 것은 예술작품을 전적으로 주관적인, 몰역사적 탈역사적 천재의 산물로 규정하는 것에서 벗어나, 그것을 역사적 맥락에 정위定位하기 위함이다." 정위한다는 것은 자리 잡는다 라는 말이다. 말하자면 시대 정신의 산물로서의 예술 작품이다. "헤겔은 자신의 체계에서는 예술을 종교 및 철학과 더불어 절대적 정신의 현현태로 규정하므로, 체계에서 보면 예술은 영원한 진리의 한 계기에 지나지 않으나 체계에서 벗어난다면 예술은 역사적 산물이 된다." 그러니까 헤겔은 예술 작품을 두 가지 측면에서 동시에 본다고 할 수 있다. 영원한 진리의 한 조각으로 예술 작품을 보거나, 영원한 진리는 세계정신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그냥 철저하게 시대 정신의 산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세계 정신의 한 조각으로 볼 것인가. 이쪽을 선택하면 저쪽이 버려져야 되고, 저쪽을 선택하면 이쪽을 버려야 된다. 사실 우리의 생각 속에서는 이율배반이다. 시대 정신의 산물로 봐야 되는가 아니면 영원한 진리의 한 조각으로 보아야 하는가. 왜 이게 문제가 되는가 하면 헤겔 이전에는 계몽주의 시대였다. 계몽주의 시대는 그런 걸 안 묻는다. 우리가 그런 것을 바랄 수는 있어도 현실화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 칸트의 비판 철학이다. 비판Kritik이라고 하는 말은, 인간이 바랄 수 있는 것의 한계, 인간이 알 수 있는 것의 한계,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것에 한계가 어디인지를 뚜렷하게 하는 것이 칸트 철학의 목적이다. 인간은 경험에 의해서 데이터가 주어진 것을 넘어서는 알 수 없다. 앎의 한계, 그러니까 비판이라고 하는 것은 경계를 뚜렷하게 하다 라는 뜻이다. 선을 긋는다는 것이다. 《순수이성비판》은 우리의 앎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 《실천이성비판》는 우리의 행함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 그다음에 《판단력 비판》은 우리가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이다. 그런데 여기서부터는 희망사항이고 바랄 수 없다 라는 것이다. 바라고는 있는데 그것을 실현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칸트는 영원함에 대해서는 우리가 바랄 수 있지만 영원함을 바라는 것은 사실은 거짓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헤겔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헤겔은 내 머릿속에 영원함이 떠올랐는데 왜 말할 수 없냐는 것이다. 이것은 참 거짓의 문제가 아니라 결단의 문제이다. 결단이라고 하니까 어마어마한 것 같은데 그냥 어떤 입장에 서느냐의 문제이다. 소극적으로 생각하면 칸트가 맞다. 그런데 지금 얘기한 것처럼 바랄 수는 있잖아 라고 생각하면 헤겔이 맞다.
즉 비판의 입장에 서느냐 아니면 헤겔처럼 다 끌어안고 가고 싶은 것이냐이다. 이를 Übergehen이라고 하는데 우리 말로 번역할 때 이행移行이라고 한다. 해결은 이행한다 라는 입장에 선다. 그러니까 사실 우리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생물학적으로 한정지어져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만질 수 있는, 우리의 감각 영역으로 감각으로 만질 수 있는 그런 것들 외에는 사실 알 수 없다. 그런데 그런 것들로부터 뭔가 데이터를 받아들였다 해도, 우리의 머릿속에서 뭔가가 생겨나서, 그것이 우리의 이념 속에서 성질의 전환을 일으키고, 그렇게 해서 우리의 재료와 이념과 기술을 통해서 전혀 다른 종류의 어떤 Kunstwerk를 만들어낸다. 사실 Kunstwerk는 현실 속에서 없는 것도 있고 순전하게 상상의 산물들도 있다. 그런 상상의 산물들도 예술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라고 하면, 그 상상의 산물 중에 하나가, 영원함이라고 하면, 나는 유한한 인간이지만 영원한 사랑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유한한 인간이 영원함으로 이행해 갈 수도 있다. 머릿속으로는 이념으로는 넘어갈 수 있다. 그런데 칸트는 그렇게 넘어가는 것을 이성의 사변思辨Spekulation, 초월적 사변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영원한 것을 이념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은 "순수한 사상思想, 초감각적 세계와 직접적인 것"에 닿을 수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예술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감각적인 것과도 관련되어 있다. 예술은 아주 감각적인 것과 전혀 감각적이지 않은 것 두 군데 모두 관여되어 있다. 그러면 예술이야말로 초감각적인 것과 아주 감각적인 것의 한 가운데 있는 것이라고 얘기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초감각적 세계와 직접적인 것, 현전하는 감각의 중간자(das Mittelglied)"이다. 중간자라고 하는 것이 바로 헤겔이 예술을 규정하는 또 다른 개념이다. 그러니까 헤겔에 있어서 "예술은 역사적 공동체적 행위의 산물", 그리고 순수한 사상, 초감각적 세계가 한 편에 있다면 또 이쪽 편에는 직접적인 것, 현전하는 감각이 있는데 그 "중간에 있는 것"이 예술이다. 인간은 피지컬에 발을 딛고서 초감각적인 것을 생각하는 중간자적인 것이다. 종교는 순전히 초감각적인 것, 초월적인 것, 신적인 것만 생각하고 그것을 넘어가 있는 것은 철학이 생각을 한다. 그런데 예술은 어쨌거나 여기 있는 재료, 이념은 모르는데, 적어도 재료는 감각적인 것이고, 이런 것들을 가져다가 이념과 기술이라는 것을 결합해서 Kunstwerk를 만들어내니까, 헤겔에 있어서 예술 개념은 중간자이다. 그리고 이것은 어떻게 보면 인간에 대한 규정하고도 서로 닿아 있는 것이다.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인간은 중간자다. 그것까지는 좀 생각을 하면 좋겠다.
책 139페이지를 보면 "헤겔의 예술론의 본령은 역사적 예술철학에 있다고 해야만 한다. 헤겔의 예술철학이 분명하게 남겨놓은 것은 무엇보다도 예술작품의 시대성, 역사성이다. 그리고 예술작품은 시대 속의 인간이 만들어 낸다고 하는 테제이다." 이건 저의 주장인데 이것을 꼭 생각해 둘 필요가 있겠다. 그다음에 141페이지를 보면 "카시러의 '상징 형식'(Symbolische Formen)의 철학과 파노프스키(Erwin Panofsky)의 예술론"이 있다. 다음 주에 파노프스키, 바사리의 예술론들을 할 건데, 그것은 현대에 있어서 예술론 그런 것에 관련된 부분이다. 이 부분은 다음 주에 설명하기로 하고 본문으로 가보겠다.
《에로스를 찾아서》 주해 43
헤겔의 예술론의 본령은 역사적 예술철학에 있다고 해야만 한다. 헤겔의 예술철학이 분명하게 남겨놓은 것은 무엇보다도 예술작품의 시대성, 역사성이다. 그리고 예술작품은 시대 속의 인간이 만들어 낸다고 하는 테제이다.
《에로스를 찾아서》 주해 43
이러한 파악 방식은 헤겔에 그 단초가 있으며 구체적으로는 카시러의 '상징 형식'(Symbolische Formen)의 철학과 파노프스키(Erwin Panofsky)의 예술론에서 전개된다.
본문 65페이지에서 인상주의 얘기를 하는데 "로스킹은 에두아르 마네의 마지막을, 그의 전생애을 압축하면서 담담하게 묘사한다"고 했는데 《파리의 심판》이다. 로스킹의 이 책은 제목에 이중적 의미가 있다. 그리스 신화에 파리스에게 아프로디테와 헤라 여신이 나타나서 누가 더 예쁘냐 라고 말했을 때부터 아주 복잡다단한 사건이 벌어지고 그걸 의미하기도 한다. 누구의 편을 들어주었는가의 의미도 있기도 하고, 그다음에 프랑스의 수도인 도시 파리가 누구를 어떻게 했는가 얘기들이기도 하다. "<폴리베르제르의 술집>을 전시했지만 언제나처럼 당황해하는 대중의 반응에 실망했다." 그다음에 <풀밭 위의 점심 식사>를 얘기했다. 그런데 거기에 인상파에 대해서 얘기가 되어 있다. 66페이지에 보면 "19세기는 공업화의 진전과 자본주의의 전면적 승리에 발맞춘 경제적 합리주의", 여기 66페이지에서 67페이지에 걸쳐 있는 얘기는 사실 《파리의 심판》 추천사의 내용이다. 사실 <폴리베르제르의 술집>이라고 하는 마네의 작품을 다룬 "폴리베르제르의 술집의 10가지 의미"라는 영어로 된 책이 있다. 그걸 읽고 인상파에 대한 생각을 적어보고 싶어서 썼다. 거기 보면 "19세기는 공업화의 진전과 자본주의의 전면적 승리에 발맞춘 경제적 합리주의, 역사과학과 정밀과학의 발전 및 그것과 결부된 사유의 과학주의, 계속된 혁명의 실패와 그 결과로 생겨난 정치적 현실주의 등의 요란한 술어로서 규정되곤 한다." 왜 여기다 19세기를 얘기를 하는가. 인상주의라고 하는 것은 Baroque 이후로 모든 회화는 항상 시대 속에서 해석을 해야 한다. 그러니까 인상주의에 대해서 진지하게 대화를 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19세기에 대한 세 가지 규정 정도는 꼭 염두에 두고 있어야 된다는 얘기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서 시대 속에서 뭔가 얘기한다고 하면 시대에 대한 규정이 먼저 있어야 한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의 파리는 사라짐과 새로움 사이에서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물론 1850년을 경계선으로 삼아 날선 대조들이 보이긴 한다."
《에로스를 찾아서》 이후로 심하게 아팠다
19세기는 공업화의 진전과 자본주의의 전면적 승리에 발맞춘 경제적 합리주의, 역사과학과 정밀과학의 발전 및 그것과 결부된 사유의 과학주의, 계속된 혁명의 실패와 그 결과로 생겨난 정치적 현실주의 등의 요란한 술어로서 규정되곤 한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의 파리는 사라짐과 새로움 사이에서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물론 1850년을 경계선으로 삼아 날선 대조들이 보이긴 한다. 그전에는 앵그르와 다비드 같은 고전주의자들과 들라크루아 같은 색채주의자가 있었지만 그 후에는 쿠르베의 사실주의와 모네의 인상주의가 나왔다. 그 전에는 낭만주의 시인과 소설가가 있었지만 그 후에는 플로베르, 보들레르의 간결하며 예리하게 날이 선 산문과 시가 나왔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확신이 없었다. 자신들이 진리를 파악했다는 확신이 없었던 것이다.
1848년이라고 하는 연대를 기억해 두어야 한다. 조선 후기, 정조가 죽은 지 48년 지난 후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이 발표된 해가 1848년이다. 표준 연도로 기억을 해두어야 한다. 데이비드 하비의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을 읽으면 된다. 여기 보면 이제 플로베르, 쿠르베와 같은 사람들이 있다. 오늘날 파리에 가면 볼 수 있는 모습이 바로 1800년대 중반에 만들어진 외젠 오스만의 수도 재건축 계획에 따른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는 이런 책을 보면 된다. 왜 이런 책들을 읽기가 어려운가 하면, 일단 19세기 후반의 파리를 구성하고 있는 핵심적인 요소들이 있는데, 우리가 어느 정도는 알고 있지만 그것들을 연결시키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체로서 쭉 아우러져서 이해를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것들은 개념들로써 이렇게 엮어줘야 한다. 이를테면 넓은 의미에서 문화사라고 하는 학문 영역 속에서 배우면 된다. 《고리오 영감》, 《부바르와 페퀴셰》와 이런 작품들도 읽어봐야 한다. 저는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에 나오는 소설은 하나씩은 다 읽었다. 이런 것들과 함께 인상파 같은 것도 이해할 때 이해를 해야 한다. 회화는 회화로서만 이해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19세기 중반에 들어오면 이미 그것들을 총체적으로 이해야 되는 그런 시대가 되었다.
"그전에는 앵그르와 다비드 같은 고전주의자들과 들라크루아 같은 색채주의자가 있었지만 그 후에는 쿠르베의 사실주의와 모네의 인상주의가 나왔다." 이런 사람들이 이렇게 쭉 나열되어 있는데 이 사람들을 묶는 것이 1850년대의 파리이다. 그리고 1850년대 파리라고 하는 것 안에서 전체를 알았을 때 인상주의 회화가 이해가 된다. 이쯤 되어버리면 거의 모든 예술 작품이 시대적인 것으로 환원된다. 그러니까 이제 19세기 이후가 되면 학문이라고 하는 건 철학 따로, 미술사 따로, 역사 따로가 아니다. 다 뭉뚱그려 있는 것이다. 따로 공부할 수 있는 영역은 수학밖에 없다. 심지어 물리학이나 화학도 시대의 분위기에 따라서 유행하는 영역이 달라진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확신이 없었다. 자신들이 진리를 파악했다는 확신이 없었던 것이다." 이게 바로 19세기 중반의 회의주의이다. 그래서 1900년이 되면 프리드리히 니체가 죽었다. 그때 바로 실존철학이라고 하는, 네가 옳다고 여기는 바를 진리로 생각하고 그대로 밀고 나가면 진리다 라고 말하는 것이 된다. 1800년대 중반부터 1900년까지가 아주 혼돈의 시대이다. 그러니까 이제 1900년이 되면 동아시아 세계가 되었건 유럽이 되었건 인류의 역사 속에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시대가 되었다. 그 무엇도 믿고 따를 수 없는, 우리가 믿고서 안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시대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10년도 되지 않아서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1900년이 되었을 때 동아시아에서는 1905년에 러일 전쟁이 일어난 것처럼 전 지구적으로 그 무엇도 믿고 따를 수 없는 그런 시대가 되었던 것이다. 1900년이면 20세기인데, 20세기에 들어서면 네 말도 옳고 내 말도 옳다는 것이 진리가 된다. 무엇이 옳다고 강요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어려운 그런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금발의 메넬라오스가 그녀에게 이런 말로 대답했다. "여보, 당신이 한 말은 모두 도리에 맞는 말이오." 지금 68페이지에서 69페이지 사이에 《오뒷세이아》에 있는 내용을 가져다가 써놓았다. 메넬라오스와 헬레네는 부부 관계인데 파리스가 상을 받아서 헬레네와 파리스가 함께 사이좋게 지내다가 결국 메넬라오스가 트로이아에 가서 작살을 내고 헬레네를 되찾아왔다. 지금 이 이야기는 되찾아온 다음의 이야기이다. 그래서 지금 《파리의 심판》 다음에다 이 얘기를 넣어 놓은 것이다. 속 좋은 메넬라우스라고 얘기를 할 수 있겠다. 속이 깊은 걸까, 속이 좋은 걸까, 속이 없는 걸까. 그냥 신들의 뜻에 따르는 남녀라고 해두자. 저는 여기에 대해서 어떤 가치 판단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사실 서사시 중에 《오뒷세이아》 4권 이 부분이 판단하기가 가장 고민스러운 부분이다. 헬레네는 아프로디테가 자기한테 미망을 씌웠다고 아프로디테 탓을 하고 있다. 그러자 메넬라오스는 "여보, 당신이 한 말은 모두 도리에 맞는 말이오."라고 말했다. 이것에 대해서 공감이 안 된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저는 썩 공감이 된다. 그러니까 이것에 대해서는 각자 한 번쯤은 생각해보면 되겠다. 《에로스를 찾아서》 맨 마지막에다 이걸 넣어 놓았는가 하면 본문은 저의 생각이고 주해는 객관적인 이론들의 나열이다. 사람의 일이라는 게 어쩔 수 없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든다.
《에로스를 찾아서》 여보, 당신이 한 말은 모두 도리에 맞는 말이오.
금발의 메넬라오스가 그녀에게 이런 말로 대답했다. "여보, 당신이 한 말은 모두 도리에 맞는 말이오."
《에로스를 찾아서》는 일단 여기서 정리를 하고 다음 주에는 미술사의 여러 사조들을 설명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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