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게이블, 찰스 윌러, 앤서니 요크, 데이비드 시티노: 문학으로의 성서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17. 10. 2.
문학으로의 성서 - 존 게이블 외 지음, 신우철 옮김/이레서원 |
1 문학으로서의 성서
2 성서 내의 문학 양식(forms)과 전략
3 고대근동 문학과 성서
4 성서와 역사
5 성서의 무대
6 정경의 형성
7 오경의 형성
8 예언서
9 지혜문학
10 묵시문학
11 중간기 유대교
12 신약성서의 헬레니즘 배경
13 외경과 위경: 외부의 책들
14 복음서
15 사도행전과 서신
16 성서 본문
17 성서의 번역
18 성서의 종교적 사용과 해석
19 여성 그리고 성서
1 문학으로서의 성서
21 성서를 '문학'으로 읽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말은 분명 다른 책들을 보는 방식으로 성서를 본다는 말일 것이다. 즉 성서를 사람의 작품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성서는 구체적인 역사적 현실을 살았던 사람들의 작품을 모아 놓은 것이다. 다른 책의 저자들과 마찬가지로 성서의 저자들도 자신들의 모국어와 자신들에게 익숙한 문학적 표현 방식을 사용하였다. 이런 과정 속에서 이들은 문학 일반에 적용되는 똑같은 조건에, 어디서 발견되든지 읽힐 수 있고 감상 할 수 있는 작품을 창조하였다. 이러한 관점은 성서가 신의 직접 계시에 의해 쓰였으며 인간의 신앙과 행동을 지도하기 위한 지침서로서 주어졌다는 전통적 종교적 입장과 반드시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다. 하지만 이 관점이 다르다는 사실은 분명하며, 그 자체의 필요 조건과 목표를 가지고 있다.
30 성서는 일반적 의미의 책이 아닌 것이다. 성서는 선집 ━ 약 100년의 기간 동안에 생산된 종교적 민족적 저작물들 가운데서 일부를 선별해 놓은 것 ━ 이다. 성서는 우리 시대에 한 책으로부터 보통 기대할 수 있는 종류의 통일성을 가질 수 없다.
35 지금쯤 편집자의 중요성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이들이 없다면 우리는 성서를 가지고 있지 못할 것이다. 문서와 자료들이 저절로 모아져 문학 단위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이런 문서들과 자료들을 모은 편집자의 의도는 원저자의 의도만큼이나 전체 의미의 일부에 속한다. 이 양자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최종 작품을 정당하게 이해할 수 없다.
2 성서 내의 문학 양식(forms)과 전략
45 '구약성서 내러티브'라고 부를 수 있는 단일한 문학 양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구약성서 내에서도 다양한 성격의 내러티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당연하겠지만 이들은 다양한 시기만큼이나 다양한 저자들에 의해서 작성되었다. 하지만 이들 모두에게 공통적인 한 가지 사실은, 그 어떤 것도 본래 어떤 일이 발생했다는 지식을 보존할 목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모든 구약 성서의 이야기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즉 이들은 어떤 신학적 의도를 저지하거나, 계약 백성의 역사에서 어떤 의미 있는 주제를 실증 해 보이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런 사실은 신명기 역사의 경우 꽤 분명하다. 이 역사는 지속적이고 공개적으로 편향되어 있다. 하지만 창세기에 나와 있는 고대 역사에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우리는 이 책을 배경이 되는 지역적 특성과 내러티브 기술을 감안하여 읽는 습관이 있지만, 사실 이 책이 이처럼 보존된 이면에는 훨씬 더 복잡한 특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46구약성서에 있는 수많은 내러티브 가운데는 기원설화(etiology: 이름과 같이 어떤 것의 기원을 설명하는 이야기), 출생 내러티브(전형적으로 불임의 아내, 신으로부터 온 손님, 수태고지 그리고 '징조'가 등장한다), 기적 이야기(엘리사와 관련된 것과 같은), 신의 현현이야기(불 타는 떨기나무 안에서 모세에게 나타난 야훼, 소돔의 멸망 전 아브라함에게 등장한 야훼), 영웅이야기(삼손, 야곱, 다니엘의 무용담) 등이 또한 존재한다.
3 고대근동 문학과 성서
87 분명 먼 고대의 전승 속에는 창조주가 대적자를 무찔러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대적자가 어떤 의미에서 창조를 위한 기반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6-5세기 BCE라는 상대적으로 진보된 시대에 살았던 창세기 1장의 저자는 유일신교에 대한 강한 신앙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대본으로부터 창조하는 유일한 신을 제외한 다른 신들을 제거시켰고, 적대자를 다소 영적인(ghostly) '깊음테홈)'으로 축소 편집하였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히브리 성서의 다른 곳에서는 그 이전 시대의 믿음에 관한 풍성한 증거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100 고대 세계에서 이전의 문학 작품의 일부를 새로운 맥락에서, 약간의 내용만 바꾸어 재생산하는 일(꽤 자주 다른 작품과 결합하여)은 완전히 받아들여지는 문학적 활동이었다. 익명의 저술이 보편적이었던 세계에서 문학작품은 대중의 자산이었다. 개인 저자의 개념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4 성서와 역사
105 구약과 신약성서의 1/2 이상이 역사 기록의 형태를 가지고 있으며. 그 나머지 대부분도 여러가지 방식으로 이 역사 부분에 설명된 사건이나 인물과 관련을 맺고 있다.
105 성서가 얼마나 역사에 관련되어 있는지를 인식하는 일은 구약과 신약을 저술한 사람들의 중심적 확신을 인식하는 일이다. 즉 그들의 하나님 ━ 고대 이스라엘과 유대교 그리고 기독교의 신 ━ 은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는 신이며, 인류에 대한 자신의 계획에 따라 사건을 인도한다. 그 과정에서 신은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며 자신을 그의 백성에게 드러낸다. 성서의 기자들은 이 신에 대해 추상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이 수세기에 걸쳐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과정에서 무엇을 했는지 말함으로써 그가 누구였고 누구인지 보여준다.
106 기독 성서문학의 저자들에게 관련된 역사란 위 모든 사건들을 포함하여 예수의 탄생과 사역 사건, 그리고 교회의 수립과 초기 성장을 포함한다. 유 대-기독교가 주장하는 역사의 범 위는 약 2,000년의 시간이다. 그 시간은 족장들의 시대로부터(1000 BCE 시대가 시작된 시점부터) 사도 바울의 생애가 끝난 지점(약 60CE) 까지이다.
107 비록 성서가 역사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지만 이 책은 역사책으로 정당히 읽혀질 수 없다.
108 첫째로 그리고 가장 명백한 이유는 성서가 비록 긴 책이긴 해도 거의 2,000년의 시간을 다루기에는 그다지 많은 분량이 아니라는 것이다.
108 그들은 과거에 대한 자료를 선별하고 그들 자신 시대의 독자들의 필요가 무엇인지 자신이 인식한 방식에 따라 역사를 기록하였다. 이 것은 성서의 거의 모든 역사책에 적용될 수 있는 공리와 같았다.
116 성서가 묘사하고 있는 그 긴 역사의 태반에 있어서 성서는 독특한 자료가 된다. 성서가 보도하는 과거의 상당 기간을 다루는 다른 고대의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성서의 보도 내용 중 9세기 BCE 이전의 사건은 외부 자료로부터 검증될 수 없다는 것은 놀랍지만 사실이다. 그렇게 검증될 수 있는 최초의 사건은 열왕기하 3:5에 기술된 전쟁이다.
116 신약에 등장하는 많은 로마 통치자들이 실제 그 직책을 보유했었다는 사실은 다른 자료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하지만 1세기 후반과 2세기 초 라틴 문헌에 나타난 기독교 운동에 대한 몇 개의 지엽적 언급을 제외하고는,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보도된 사건들에 대해서는 어떤 독립적 증거도 존재하지 않는다.
116 성서가 보도하고 있는 많은 사건들에 대해 성서가 유일한 출처라는 사실은 사건에 대한 내러티브가 고대근동 역사가들에게 특별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은 성서의 이야기가 뚜렷한 종교적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성서를 단순히 폄하할 수 없다.
117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성서 저자들에게 있어서 역사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단지 더 큰 목적을 위한 수단이라는 사실이다. 이들의 생각에 한 사건의 진리는 그것이 일어났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에 있다. 성서로부터 "실제 무엇이 일어났나?"를 말해 줄 것을 기대하는 것은 그 저자들이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무엇을 기대하는 것이다.
5 성서의 무대
126 팔레스타인 이전의, 그리고 아마도 원래의 지명은 가나안(Canaan)이다.이 지역의 거주자들은 구약성서에서 획일적 공식 가운데 반복해서 등장한다.
126 그리고 자주 이들보다 강력한 주변 이웃 국가의 간섭 하에 있었기에 가나안인들은 결코 강한 국가적 정체성을 확보하지 못했다. 이들은 13세기 BCE에 시작된 (일반적 견해에 의하면) 이스라엘인들의 정복에 의해 사라지게 된다.
126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에 국가를 세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단지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만 그 땅을 정치적으로 통일할 수 있었다. 계약, 출애굽, 그리고 정복 전승에도 불구하고 지역에 대한 충성도가 국가에 대한 충성도보다 강했음이 증명되었다. 일반적인 이스라엘인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전체 지역보다는 자신들과 가까운 이웃에 더 많은 신경을 썼다.
141 실제 종교는 개인적이고 가정 내에서 이루어졌다. 종교적 믿음은 수 세기에 걸친 반복에 의해 형성된 신념과 관행에 의해 형성되었다. 이러한 믿음은 국가적 규모의 사건에 의해 거의 영향받지 않았다.
141 비록 성서 기자들이 야훼가 우상 숭배(우상 제작까지)를 싫어하는 신이라고 주장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고고학적 증거를 보면 점토나 금속으로 만든 작은 신상들이 야훼 자신의 것을 포함하여 수없이 발견된다. 어떤 신이 자신의 일상을 지켜보고 있다는 관념(문자적으로)은 집 안의 벽에 벽감이나 선반을 설치하여 이런 신상을 모셨다는 점에서 확인 될 수 있다.
141 창세기 31장의 이야기에 나오는 가정신의 언급은 그 중요성을 정확하게 반영한다고 말할 수 있다. 신상은 가계 유산의 일부였으며 그 가정과 신과의 관계의 역사를 함축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142 인류가 제한된 지역에 고착되어 인생의 대부분을 보낸다는 핵심적 사실은 자신이 섬기는 신이 그 지역 만의 신이라는 믿음을 통해 나타난다. 야훼는 이스라엘의 신이다. 즉 백성뿐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땅의 신인 것이다. 이는 마치 그모스가 모압의 신이며 밀곰이 암몬의 신인 것과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성서 시기 동안 보편적 신에 대한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야훼 숭배를 포함 모든 종교가 암묵적으로 다른 신의 존재를 인정한다(물론 다른 신은 자신 영역 밖에서는 무력하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이 야훼와 맺은 계약이 땅('약속된')의 소유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불가피하다.
6 정경의 형성
147 비록 성서가 신의 영감 가운데 기록되었다 하더라도, 전체가 신의 계시로 간주된다 하더라도 신은 종이 위에 한 자도 기록하지 않았다. 성서의 기록은 역사 ━ 인간의 역사━에 활동했던 인간에 의해서 기록되었다.
148 인류가 이 지구 위에 퍼지고 문명의 기술을 발전시킨 수천 년 동안 성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성서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상대적으로 최근의 일이며, 지중해 동쪽 끝 작은 나라에서, 히브리인 혹은 이스라엘인으로 알려진 특정 민족의 국가적 경험의 일부로 나타났다. 하지만 이 사건도 갑자기 일어난 것은 아니다. 이들 역사의 상당 기간 동안 이 민족들 역시 성서가 없었다.
150 성서 내의 그 어떤 책도 이것만큼 직접 신에게서 수여 받았다고 간주되지 않는다. 토라는 유대 신앙의 기초이며 처음부터 끝까지, 장별로, 연중 유대 회중에 의해 제의적으로 읽히고 있다. 토라에 대한 기독교인의 태도는 다소 다르지만 유대와 기독교의 모든 성서는 정확히 이 다섯 권의 책으로 그리고 같은 순서로 시작한다.
157 얌니야에 있었던 위원희가 성문서에 대해 내린 결정은 본질적으로 수세기에 걸쳐 신자들 사이에 비공식적으로 이미 정경으로 인식되어온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100CE(편의로 어림잡은 숫자이지만 실제로 상당히 정확한 시간)쯤 되었을 때 유대 성서의 정경은 완전히 확정되었으며, 일반적으로 얘기하듯 유대교는 '책의 종교'가 되었다.
158 기원 후 두 세기는 문학 활동이 왕성했던 시기였다. 새로운 정경화 작업에 관한 생각이 생겨난 것은 현재 신약에 담긴 모든 문서와 그 외의 문서들이 이미 쓰인 이후였다. 결국이 문학 작품 중 일부만이 정경이 되었다. 그 나머지는 사라졌거나 영원히 '외부에' 놓이게 되었다.
159 마태와 누가가 80-90 CE 경에 복음서를 쓰면서 마가복음을 사용했을 뿐 아니라 수정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생각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마가복음이 아직 정경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하지만 이 시기와 2 세기 중반 사이에 상황은 급속하게 변하였다. 4개의 복음서가 출간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이 4복음서 전부를 손에 넣었고 하나의 책으로 엮었다.
162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은 이것만이 자신들의 성서이고 정경은 문이 닫혔다고 결정하였다. 일단 문이 닫히면 다시 열 릴 수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변화의 가능성은 커지기는커녕 줄어든다. 인간이 만든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성서의 정경은 시간이 지날수록 견고해지고 지지된다.
163 비록 정경이 처음에는 신자들의 합의에 의해서 창조되었을 수 있어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는 진짜 관심은 성직자나 랍비 기구에 있다.
163 비록 성서가 철두철미한 신의 말씀이라면 이론상 모든 부분이 같은 정도로 유용하고 적절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성서를 그렇게 사용하지 않는다. 정경에 포함 된 모든 책이 실제로 정경적으로 평등하지 않다. 모든 독자들은 정경 내에 자신만의 전경이 따로 있다. 즉 습관적으로 읽는 특정한 책들과 특정 구절이 있는 것이다. 이 말은 어떤 책이나 구절은 한 번도 읽지 않았거나 억지로 읽었다는 것이다.
163 귀신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성서를 인용할 수 있다는 유명한 격언은 이 엄청난 책의 다양성과 복합성을 암시한다. 여기는 모든 취향에 알맞은 무엇인가가 존재하고 있다. 만일 정경이 오늘날 재승인을 위해 투표에 회부된다면 우리 중 대부분은 어떤 부분을 배제하는 데 찬성표를 던질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다른 어떤 책도 성서 속에 들어올 수 없을뿐더러 현재 정경에 포함된 어떤 책도 나갈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경이 닫혀 있다는 의미이다.
7 오경의 형성
170 우리가 주장할 이론에 의하면 오경이 수많은 자료로부터 구성되었으며 이 가운데 모세에게 돌려질 자료는 없다는 것이다. 또한 수 세기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민족에 대한 전통적 자료를 가지고 다양한 동기에 의해 작성되었다는 입장이다. 이들은 이 자료로부터 일부를 떼어내고, 붙이고, 다시 쓰고, 확장시켜 현재의 책을 완성한 것이다.
177 성서학자들은 이 이야기들의 출처를 소위 '야훼문서'라고 지칭하는데 아스트룩의 통찰에 따른 것이다. 이 야훼문서 출처는 대문자 J로 쓰기로 했다. 또 다른 출처는 '제사상(Priestly)' 혹은 P로 나타낸다. 왜냐하면 이 문서가 제의 규정에 지대한 관심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러한 특성은 창세기보다는 오경의 후반부로 갈수록 더욱 두드러진다. 현재 창세기에서 발견되는 세번째 출처가 있는데 이를 '엘로힘 문서(Elohist)' 혹은 E로 나타낸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문서가 존재하는데 그것을 '신명기 문서 혹은 D라고 지칭한다.
179 제사장 저자들이 대본으로 작업한 두 문서 가운데 J가 좀 더 오래된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많은 학자들은 야훼문서가 기본 문서라고 생각하고, 한때 독립적으로 존재했었다고 믿는다.
8 예언서
205 성서의 예언을 진지하게 처음으로 접하는 사람이라면 먼저 역사적 기초에 대한 관점을 갖고 항상 각주가 달린 현대어 번역을 사용해야 한다. 그 각주를 보면 역사적 상황에 대한 설명이 달려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도를 통해 그 텍스트가 본래 관심이 있었던 고대 세계의 각 부분을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역사적 의미가 성서 예언이 의미하는 전부는 아닐 수가 있다. 하지만 그 기초 위에 모든 다른 진정한 의미들이 구축되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이 어떤 종교적 관점을 가지고 예언서를 읽든 그 예언자들이 언급한 일차적인 의미는 언제나 이들이 활동했던 상황과 사건이었음을 명심해야 한다. 이 사실을 무시한다면 누구라도 예언자들의 말씀을 이해하는 가장 확실한 수단으로부터 자신을 고의적으로 분리시키는 것이 될 것이다.
9 지혜문학
223 집회서와 솔로몬의 지혜 같은 책들이 왜 유대 정경에 포함되지 못했나의 문제는 우리가 이미 6장에서 언급하였다. 이 책들은 유대인들에 의해 신적 계시의 기간이 종료되었다고 여긴 시점 이후에 작성된, 상대적으로 후기에 속하는 문서로 인식된 것이다. 하지만 초기 3권의 책들은 어떻게 정경에 들어오게 되었을까?
224 먼저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잠언, 욥기, 전도서가 초기 유대교 내에서 상당한 호소력을 발휘했다는 점이다. 아마도 그 매력은 종교와 윤리와 같은 어려운 문제를 다루는 데서 이 책들이 보여준 정직함일 수 있다.
230 분명 지혜 문학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가장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이스라엘/유대 문화의 부분과 접촉할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이 작품들이 의도한 청중들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조직화된 복잡한 사회 속에 갇혀 있었고, 성공하기를 갈구했으며, 삶의 혼란을 피하려고 애썼다. 또한 일상의 현상 가운데 의미 있는 패턴을 발견하고자 한 것이다. 현자들이 주목한 문제 의식은 시간을 초월하며 보편적인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들의 작품은 언제 어디서나 읽힐 수 있는 것이다.
230 고통의 문제는 결코 해결될 수 없었다. 하지만 인간은 영원히 그 문제를 풀기 위해 고통스런 시도를 지속해야만 한다. 욥기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일상의 끊임없는 흐름 가운데 의미의 탐색은 끝나지 않는다. 이것이 전도서와 지혜서의 주장이다. 삶의 투쟁 가운데 어느정도 평정심을 갖고 인내하여야 하며, 우리는 좋은 조언이라면 어떤 것이든지 받아 들여야 한다. 그것이 잠언과 집회서의 목소리이다. 성서의 지혜 문학은 인류를 위한 문화 창고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이것을 알지 못한다면 성서가 제공할 수 있는 최상의 선물의 일부를 놓치게 될 것이다.
10 묵시문학
237 묵시적 환상을 통한 기괴한 이미지 수단을 통해 저자는 포로기 시기부터 자신의 현재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개관한다. 그의 목적은 자신이 현재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이 순간에도 자신의 백성들이 겪고 있는 공포가 모든 고통의 절정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함이다. 이스라엘은 이방 압제자들의 손에 그 모든 고통을 인내해야 한다. 다음 단계는 단지 신이 직접 그 백성을 위해 개입하는 것이다.
240 묵시에 나타난 갈등의 수준은 우주적이다. 등장 인물들은 하늘과 땅을 쉽게 오고 간다. 그리고 천사들이 서로 전쟁을 벌이고 막강한 지상의 군대가 신의 능력에 의해 파괴되는 영역까지 이동할 수 있다. 여기에 아이러니가 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거대한 우주적 활동은 지상의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살고 있는 소수 민족(유대인이나 혹은 초기 기독교인)의 운명에 반응하여 일어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240 셋째, 개별 묵시가 저자 개인 시대의 역사적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쓰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문헌은 실제의 역사보다는 소위 '종말론적' 문제 혹은 '마지막에 관한 일'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241 넷째, 묵시 문학은 종종 그 작품 내의 화자가 경험한 환상에 관한 보고의 형식을 띠고 있다.
246 계시록은 단순히 말해 묵시이다. 즉 저자는 자신의 시대가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시기로 믿고 있다. 즉 마지막 때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고통의 시기 동안 신자들은 인내 할 수 있도록 격려 받아야 한다. 곧 구원의 시기가 도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246 계시록이 쓰인 시기, 그리고 상정한 시기는 언제인가? 일반적으로 이 책은 첫 기독 세기의 마지막 10년 사이에 작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기는 로마 제국 내에 거하는 신민들에게 최소한 겉으로나마 황제 숭배에 참여할 것을 강요하던 때에 해당한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 요구에 응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극심한 박해를 받고 있었고, 때로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250 66CE에 로마 압제에 대한 반란이 유대 땅에서 시작되었다, 73년이 반란이 진압되었을 때 성전은 파괴되었고 수천 명의 유대인이 로마병에 의해 살육되었다. 이 반란에 참여한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으로는 로마에 대한 해방전쟁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충분히 인식하고도 반란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묵시 작가들이 예견한 일들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었다. 유대 민족이 그 마지막 한계에 다다를 때 신의 군대가 개입하여 자신들을 구원할 것이며 현시대가 종말을 볼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이 애국 투사들은 신의 개입(hand)을 추진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래서 전쟁을 일으킴으로 신이 개입하여 종료시킬 수 있도록 강요한 것이다.
251 많은 유대인들이 가까스로 예루살렘을 빠져나와 얌니야로 향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생존한 민족의 지도자들이 모여 일어난 사건에 대한 의미와 앞으로 유대교가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를 토의하였다. 이 논의의 결과는 성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특히 유대 종교 문헌 가운데 어떤 작품들이 성서의 정경에 포함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자격 논의가 이루어졌다. 그 결정 가운데 하나는 전반적으로 묵시문학에 대한 강력한 혐오감을 반영하고 있었다. 이 책들이 열심당 애국투사들로 하여금 로마에 대한 반란을 촉발시켰기 때문이다.
251 유대교는 이제 묵시적 사고로부터 등을 돌리고, 대신 고대 율법의 현재적 의미를 탐구하는 방향으로 관심을 쏟게 되었다.
251 하지만 위와 같은 사실이 1세기 기독교인들에게 다르게 받아들여졌다. 묵시가 유대인들에게 단지 실망만을 안겨주었다면 기독교인들에게 그 약속은 바야흐로 성취의 문턱에 도달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물론 그들도 신의 능력이 이 세상에서 그의 신실한 백성을 위해 아직 공개적으로 전개되지 않았다는 점은 인정했다. 신의 아들은 천군의 사령관으로서가 아닌 겸손한 갈릴리인으로 지상에 나타났었다. 하지만 사실을 정확히 판단하자면 그리스도의 삶, 죽음, 부활, 그리고 하늘로의 귀환은 모두 그의 '초림(first coming)'을 구성하는 요소로 부족함이 없었다. 이 사실은 그를 믿는 자들의 구원을 성취하기 위한 필수조건이었다.
253 고대 묵시 작품의 저자들은 마지막 때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자신의 때야 말로 그 시기 가운데 최악의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이제 종말의 전조가 시작되었다고 믿었다. 우리는 지금 이들이 틀렸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이 지닌 오만을 생각해 볼 때, 우리 역시 '우리의 시기'가 최악의 시간이고 종말을 위한 '진짜' 서곡이 시작되었다고 상상할 수 있다.
11 중간기 유대교
272 요세푸스는 서로 다른 곳에서 2번의 언급을 통해 유대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들이 한 번도 단일 공동체를 이룬 적이 없음을 이해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유대인들의 4개의 '철학' 노선을 구별하였다: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 그리고 (아마도) 열심당원이 그것이다.
273 유대 성서에서 전반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이전의 관점에 의하면 각 개인은 분열될 수 없는 살아있는 전체, 즉 nephesh hayyah(네페쉬 하야: 생령)이다. 인간의 모든 운명은 이곳 지상에 위치한다. 지구는 특별히 인간을 수용하기 위해 창조된 곳이다. 죽음과 동시에 사람은 스올(Sheol)이라는 어두운 지하세계로 내려가는데 이곳에서 영원히 머무르게 된다. 이러한 개념의 중요한 필연적 결과는 모든 보상과 처벌이 이곳 지상에서 주어진다는 원칙이다. 이것이 신의 정의로서 각 개인의 행위에 따라 분배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이 중간기 전까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다.
282 종말론적 심판자로서의 인자에 대한 독립 전승은 중간기 후반에 다윗 계보의 지상의 왕으로서 ━ 미래에 이스라엘을 다스릴 것이다 ━의 메시아 전승과 결합되었다. 인자/메시아가 하늘로부터 왔다는 믿음이 발전하여 이제 그 자신이 신이라는 믿음이 등장하였다. 이것을 우리가 기독교에서 발견 할 수 있는 것이다.
12 신약성서의 헬레니즘 배경
287 히브리어로 쓰인 구약 다음에 그리스어로 쓰인 신약이 따라오게 된 현상은 이 두 문서의 어느 곳에서도 언급되지 않은, 중대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 사건 때문이다. 그것은 4세기 BCE에 일어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 전쟁이다.
287 신약을 공부하는 학생에게 헬레니즘의 중요성은 단지 성서의 언어가 변했다는 설명을 능가한다. 이전 장에서 언급한 것처럼 팔레스타인 유대교의 한 분파로서 시작한 기독교는 헬레니즘에 의해 충분히 세례받은 세계의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신약 성서의 저자들과 원청중들 모두 그리스어를 말하였고, 이들 중 더 많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그리스 문학과 철학에 친숙했을 것이다.
300 바울이 최후의 심판과 부활이라는 주제로 넘어가게 되었을 때만 특별히 기독교적인 주제를 제시한 바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그는 청중들로부터 격렬한 반대에 직면하게 된다. 하지만 일부 청중은 더 듣고 싶어했으며 소수의 일부는 개종까지 받아들였다.
300 바울은 자신의 종교가 보는 관점에서 스토아 철학의 덕목과 약점을 드러냄으로써 청중들에게 호소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스토아와 기독교의 윤리 사이에는 놀랍도록 일치하는 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나는 이성에 기반을 둔 철학으로서 다른 하나는 계시에 기초한 믿음 체계로서 이 두 운동은 인간의 행동에 관해 사실상 동일한 관점을 소유하고 있었다.
301 스토아 시상이 기독교의 일부 중요한 개념을 미리 제시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스토아 사상의 로고스는 물론 기독교의 신과 거리가 멀다. 하지만 세계관을 보자. 세계가 통합된 전체이며, 한 지적 존재에 의해 가장 세밀한 부분까지 고안되고 충만해 있다는 생각은 비록 엄격히 말하자면 범신론적이지만 기독교의 관점과 양립될 수 없는 것이 아니었다.
307 기독교가 70CE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 이후 유대교의 일개 종파의 지위를 벗어난 일과 바울이 편지인 초기 서신들과 이후의 복음서가 현재의 형태를 가지게 된 현상은 헬레니즘의 환경 밖에서는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13 외경과 위경: 외부의 책들
322 제롬의 새 번역이 라틴 구역을 대체하여 교회 내에서 읽히기 시작하고, 광범위한 환영을 받게 되면서 그가 번역하지 않았던 나머지 외경의 라틴 구역이 그의 번역에 첨가되었다. 그렇게하여 1,000년 동안 가톨릭 교회의 공식 성서 외경의 라틴역과 이들의 불안정한 지위에 관한 제롬의 언급을 동시에 담고 있게 되었다.
322 루터의 성서가 외경을 이런 식으로 소외시킨 첫 성서는 아니다. 하지만 그의 명성과 그의 번역이 끼친 영향력 때문에 루터의 조치는 그 이후 다른 언어로 번역된 많은 개신교 성서의 관행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323 1546년 트렌트 종교 회의에서 로마 가톨릭교회는 외경에 대해 번지고 있는 부정적 반응에 대해 단호하게 반응했다. 그 회의에서 가톨릭 교회는 15권의 (외경)책들 가운데 12권의 정경성을 인정하지 않는 자는 누구라도 파면될 것이라고, 저주받을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이 후 로마 가톨릭은 16세기 때보다는 보다 자유로워졌고 당시 교회회의 선언과는 입장을 달리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 시대에 트렌트 결정에 반대하는 가톨릭의 의견이 종종 발표되고 있다. 하지만 로마 가톨릭의 공식 입장은 여전히 그 12권의 책들이 성서의 일부라는 것이다. 가톨릭 관행에 따르면 이 책들은 '외경'이 아니라. '제2의 정경(Deuterocanonical)'이다.
14 복음서
341 이 네 권의 복음서는 각기 그 내용, 배열, 강조, 그리고 목적에 따라 근본적으로 다르다. 비록 네 권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좋은 소식'을 전하고 있지만 각자 자신의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네 개의 다른 관점에서 그 주제를 관찰할 수 있다. 그렇다고 차이점이 판이한 것은 아니다. 이 중 세 귄 ━ 마태, 마가, 누가 ━ 은 이야기를 서술하는 방식과 텍스트 상에 서로 관련성을 갖고 있는 점에서 많은 공통점이 있다. 때문에 이 세 권을 '공관(synoptic: '같은 관점'으로 볼 수 있다) ' 복음이라 부른다.
344 가장 초기의 복음서가 나타나기 전에 이미 수많은 기독교회들이 지중해 세계 전반에 걸쳐 존재해 있었다. 당시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메시지의 내용은 입을 통한 설교에 의해 전달되었다. 이 구전 전승은 의심할 바 없이 예수의 사역에 관한 중요한 사건에 대한 내러티브뿐만 아니라 그의 말씀을 포함하고 있었을 것이다.
361 요한의 예수는 자신의 삶에서 사건의 질서를 지배하는 신의 이해를 소유하고 있다. 따라서 외부로부터의 압력에 거의 영향받지 않는다. 이중 가장 현저한 특징으로 요한복음의 예수는 갑자기 말을 쏟아 놓는다. 그리고 자신이 누구이며 왜 여기 왔는지에 관해 장황한 설교를 시작한다. 그의 청중들이 여전히 대부분 이해하지 못한 상태인데도 예수는 계속해서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 자신의 존재에 관해 의사 소통을 자제하고 비밀성을 유지하려던 공관복음의 특징은 완전히 사라진다. 여기서 그는 어떤 것이라도 과감히 얘기한다. 메시지는 비유를 통하지 않고 직접적이고 완전한 주해적 논증을 담아 전달된다. 이 논증 가운데 주요한 주제는 아들 예수와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공관복음에서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은 주제이다.
15 사도행전과 서신
371 28장으로 구성된 사도행전은 대략 30-60CE 사이의 사건을 기록한다. 즉 제자들에 대한 예수의 마지막 말씀으로부터 로마로의 바울의 마지막 여행을 포함한다. 만일 사도행전이 약 90CE에 기록되었다면, 사도행전이 기록하고 있는 마지막 사건과 실제의 저술 사이에는 거의 한 세대라는 간격이 존재하게 된다. 누가는 자신 이이 역사의 어떤 것도 실제 목격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가 기록한 많은 사건들은 그가 실제로 직접 알았을 가능성이 없다.
372 일반적으로 누가는 바울 서신에 관한 지식 없이 글을 쓴 것으로 가정된다. 따라서 누가는 바울의 사역에 관해 자신의 개념을 상정했고, 그렇게 제시하였다. 하지만 역사적 사건에 의해 자신의 그림을 반박하게 될 바로 그 증거가 후에 자신이 속한 교회의 정경 작품 가운데 나타나리라고는 예견하지 못했다.
388 분명한 점은 바울의 종말사상이 어떤 특정 예언이나 또는 예수의 말씀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종말론을 나사렛 예수 가운데 신이 성육신했다는 자신의 해석에서 유도하였다. 이 점이 그에게는 중요했는데 인간은 최후의 심판 때, 그리고 인류의 역사가 종료되는 시점에 신과 화해할 수 있는 짧지만 충분한 기회를 제공받을 것이다.
389 바울은 '파루시아' 혹은 재림이 자신이 생존한 시대를 지나 멀고 상상하기 힘든 미래로 연기될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교회는 궁극적으로 재림이 연기되었다고 인정하게 되었다. 바울은 이 문제가 불거지기 전에 죽었다. 하지만 연기의 한 측면은 그의 생존에 드러나게 되었고, 바울 자신도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이제 기독신자들도 보통 방식으로 죽어가기 시작했고 땅에 묻히고 있던 것이다.
390 복음서에 없는 내용이 기독론이다. 기독론이란 예수의 이야기가 모든 시대와 장소에 걸쳐 인류를 향한 의미를 조직적이고 합리적이며 총체적으로 이론화한 것이다. 이 필요는 복음서가 쓰이기 전에 선교사로서 오랫동안 사역하고 있었던 바울이 앞서 간파하였다. 바울은 의심 할 바 없이 힘겨운 경험을 통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개종하고자 한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그리고 왜 믿어야 하는지 가르쳐야 한다는 점을 인식하였다.
391 바울의 최고의 교리는 믿음을 통해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이다. 이교리는 (1) 그가 유대교로부터 물려받은 세상에 관한 그림을 기독교적 계시를 통해 적합하게 드러낼 수 있으며, 동시에 (2) 기독교의 독특성을 부정하고 삼키려는 그 유대교의 시도에 대항할 수 있는 자신의 방식이었다.
394 분명 바울이 아는 일부 신자들은 믿음을 욕망에 탐닉할 수 있는 허가증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그리고 많은 신자들이 개종 이후에도 믿음을 갖기 전과 거의 다를 바 없이 행동하였다. 바울의 반응은 이들의 행동을 비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물론 모세의 율법에 호소해서 더 이상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바울은 사실상 이 행태가 비기독교적이라고 비난하였다.
397 바울을 빼놓고 기독교가 어떻게 변했을까 상상하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바울을 빼놓은 신약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다. 신약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최소한 우리가 알고 있는 힝태는 아니었을 것이다. 질적으로 그의 작품은 우리가 구약과 신약에서 만나는 작품 가운데 최고의 수준이다.
16 성서 본문
403 일반적으로 우리는 주어진 성서 사본의 본문이 그 저자가 쓴 내용을 정확하게 대표하고 있기를 희망하지만 그렇다고 조금도 보장할 수 없다. 계속해서 사본을 만들다 보면 변경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 횟수가 많아질수록 가능성은 더욱 커진다. 그리고 이와 같은 무의식적 변경 외에도 필사가가 원본을 '바로 잡고' '개선하려는' 시도 가운데 의도적 변경도 발생한다.
406 에라스무스가 출간한 그리스어 신약성서는 1633년판 이후 공인본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가 사용한 사본들은 모두 앞서 설명한 비잔틴 계열을 대표하는 것들이었다. 따라서 현재는 사실상 어떤 지위도 부여받지 못한다. 그 이유는 본질적으로 이 '공인본문'이 신약 본문 비평가들이 19세기 이후로 부정적 인식을 가져온 후대의 열등한 사본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412 어떤 학자는 이런 변화를 '경건한 변형'이라 부르고, 어떤 사람들은 '정통의 오염'이라고 부른다. 이 문제에 관해 파비스만큼 정확하게 언급하지 못했다. 신약사본들 사이에 발견되는 수천 개의 이문(variants)은 의도적인 것이다. 이 이문들을 단지 오류나 본문을 부주의하게 다루어서 생긴 결과로 인식해서는 안된다. 많은 이문들은 신학적 혹은 교리적 이유에 의해 생겨났다. 신약성서의 책들은 종교적 문서이고, 거룩한 책이자, 정경적 지위를 갖고 있기 때문에 필사가가 진정한 독법이라고 믿는 바에 따라 변경되었다. 필사가의 관심은 '본래 독법(original reading)'이 아니라 '진정한 독법(true reading)'에 있었던 것이다.
413 현재 마태가 자신의 복음서를 작성할 때 마가복음을 사용한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하지만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사이에 문자적 일치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것 역시 놀라운 점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일부 학자들이 믿고 있듯이 마태가 사용한 마가복음은 우리가 알고 있는 마가복음이 아니라 보다 초기의 다른 모습의,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마가복음일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기록된 사본에 나타나는 본문상의 수많은 차이는 이 작품들이 처음부터 다양한 버전으로 발행되었기 때문일 수 있다.
17 성서의 번역
423 성서를 이토록 숭앙한 수 없는 사람들 가운데 1퍼센트의 반조차도 그 실제 말씀을 읽어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이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로 적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 인구 중 극히 적은 수의 사람들만이 읽을 수 있었다. 그 외 모든 사람들은 번역에 의존해야 했다. 따라서 성서 번역의 역사와 현재의 상태는 성서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424 칠십인역은 초기 기독교인들의 성서였고 이에 따라 기독교회가 자신의 책이라고 주장한 유대 성서의 형식을 제공하였다. 그리고 신약 성서 저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칠십인역으로부터 가장 초기 형태의 구약 라틴 번역이 이루어졌다. 이 번역은 또한 4세기 CE 제롬에 의해 만들어진 라틴 성서에 큰 영향을 주었다. 동방 정교회는 여전히 칠십인역을 자신의 구약성서로 사용한다.
424 제롬이 이루어 낸 작품은 한 사람이 성취할 수 있는 뛰어난 결과물임이 분명하고, 4세기 후반 교회가 성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 번역이 경쟁관계에 있는 다른 번역본들을 대체하는 데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였다. 하지만 이후 불가타는 서방교회의 공식 성서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굳히게 되었으며, 그후 천 년간 그 지위를 도전받지 않았다.
425 4세기에 성서 전체가 라틴어로부터 초기 독일어인 고딕어로 번역되었다. 그리고 1,000년 후에 위클리프의 추종자들에 의해 라틴어에서 영어로 번역되었다.
427 구원이 엄격하게 개인과 신 사이의 문제이며 교회에 의한 중재가 필요없다는 점은 마르틴 루터의 강한 확산이었다. 인간은 신이 은혜로 선사한 믿음을 가질 수 있다. 이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누구라도 성서의 신비에 대한 열쇠를 쥘 수 있으며 이 성서를 공부할 권리를 갖게 된다고 루터는 생각하였다. 따라서 성서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제공되어야 했다. 번역은 필수적이었고, 그 번역은 가능하면 성서 원문에 충실해야 한다. 따라서 라틴 불가타가 아닌, 히브리 성서와 그리스 신약성서로부터 번역되어야 하는 것이다.
430 1603년 여왕 엘리자베스 1세가 죽고 국왕 제임스 1세가 등극하자 새롭고 보다 정확한 영어 번역에 대한 압력이 가중되기 시작했다. 제임스 1세는 이를 공인했다. 그리고 1604년이 작업을 수행할 대규모 학자들을 임명하였다. 이 작업은 1611년 끝났는데 처음에는 상당한 저항에 시달려야 했다. 특히 여전히 제네바 성서 사용을 옹호하던 청교도들의 반발이 심했다. KJV가 영어를 사용하는 개신교들 사이에 이론의 여지가 없는 최고의 성서가 되기까지는 아직 수십 년의 시간이 지나야 했다.
431 RV(개정역)의 신약 성서는 1881년, 그리고 구약성서는 1885년 출간되었다.
432 20세기 상반기에 성서 전체 혹은 일부에 대한 새롭고 가치 있는 번역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광범위하고 지속적 관심을 끌게 될 다음 주자는 1930년대 미국 개신교회들이 구성한 기구에 의해 나타나게 되었다. 이들의 작업은 1952년에 완성되었는데 이것을 RSV라 부른다. 이 성서는 앞선 ASV을 개정한 것이다.
18 성서의 종교적 사용과 해석
460 신약의 예수 내러티브는 예수가 1세기 초의 유대인들에게 말씀을 전한 것으로 기록한다. 그리고이 내러티브를 쓴 사람들은 1세기 후반의 특정 청중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렇다면 모세의 말과 예수의 말이 후대의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적용되는 것인가? 오늘날의 유대인들이 모세가 명령한 동물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 태만한 것인가? 내일을 걱정하지 말라고 명령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이 화재 보험을 들고 연금 펀드에 가입하면 예수의 가르침을 위반하는 것인가? 성서를 종교적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먼저 성서로부터 자신에게 의미있는 부분을 선택하여 그 부분이 성서 자체와 일관적이고 일부 전반적인 종교 체계와 일치하는 방향으로 해석해야 한다. 이렇게하는 것이 자명하다.
462 세례에 관련된 이 같은 현상은 다른 많은 교리적 문제들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신적의 본질, 예수의 인성과 신성의 관계, 악의 문제, 의인의 고통의 문제, 기독교 성찬 예배의 의미 등이 그것이다. 이런 문제들에 관한 한 신자들 사이에 언제나 의견의 큰 간격이 존재한다. 그런데 근본적으로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유대━기독 성서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다양한 자료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474 이미 독자들에게 설명한 것처럼 복음서와 사도행전은 바울의 첫 편지 이후 20-40년이 지나고 작성되었다. 이 기간 동안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의 반목이 증가일로에 있었다. 이 저자들은 유대 성서 가운데 주로 예언서를 통해 예수의 삶과 기독 교회의 초기 시대에 발생한 사건들이 이미 오래 전에 성서에 언급되어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이 사건들은 신의 계획의 일부이며, 신이 전 역사를 통해 인도해왔던 위대한 목적이라고 입증하였다. 자신의 상황에 적합하도록 의미를 창조하기 위해 기독교인들은 예언서의 저자들이 의도했던 의미를 사상시켰다.
476 갈릴리 출신의 평범한 추종자들을 위한 예수의 가르침이나, 고대 제국의 여러 곳에 산재된 소수의 기독 공동체를 지향했던 바울의 조언이 어떻게 로마에 중심지를 갖게 된 고도로 조직화되고, 부유하며, 강력한 교회에 적용될 수 있을 것인가? 다시 한 번 성서는 사도행전에 기술된 원시교회와는 전혀 다른 교회 조직이 신의 말씀으로부터 생명력을 확보하기 위해 매우 자유롭게 해석되어야만 했다. 게다가 기독교인들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유대 성서를 자신의 성서로 전용시켜야 하는 지속적인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이 목적을 달성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문자적 의미를 넘어 '구약'성서를 해석하는 일이 필수적 도구가 되었다.
479 대중적인 개념상 성서는 종교의 원천이다. 하지만 역사의 증거는 그 반대이다. 종교가 성서를 창조한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이스라엘에 성스런 문서가 있기 전에 이스라엘의 종교가 있었다. 유대 성서가 있기 전에 유대교가 있었다고, 기독 성서가 있기 전에 기독교회가 있었다.
479 종교가 성서를 창조한 것처럼 종교는 성서를 해석한다. 아니, 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성서를 조직체의 구성원들에게 전달하는 일이 각 종교 조직체의 기능이다. 성서는 스스로 설명하지 않는다. 성서는 고대 유대교와 기독교의 작품들 가운데 일부 작품을 모아 놓은 거대하고 복잡한 선집이다. 종교 속에서 기능하기 위해 성서는 선택되어지고 구별되어져야 하며 그 내용은 상당히 해석되어야 한다.
19 여성 그리고 성서
501 그의 독법은 창세기 2장에 대한 '요약'이 아니라 '해석'이다. 현대의 독자들은 예를 들어 아담과 이브 '모두' 죄에 빠졌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리고 창세기 내러티브 자체는 한 번도 '죄'라는 용어(혹은 개념)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모데 전서 2:11-14은 정당화를 위해 히브리 성서를 이용한 초기 기독 율법의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기독 정경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거의 2,000년 동안 여성 지배를 위한 수단으로도 이용되었다.
503 야훼는 만일 아브라함이 자신의 (남자) 아이들을 야훼에게 성결하게 하면, 땅과 함께 하늘의 별처럼 많은 자손을 주겠다고 약속한다. 이 계약에 대한 표시는 남성의 할례였다. 놀랍게도 여성은 아브라함 계약에서 빠져있다. 일부 유대 페미니스트들은 유대 여성들이 과연 유대인인지 고민한다. 왜냐하면 기술적으로 이 계약은 여성들에게 구속력이 없기 때문이다. 이 계약의 구체적 상징은 남성 몸의 일부에 나타난 표식 혹은 절단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아브라함 계약은 아버지의 권리로서의 가부장제의 수립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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