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 20분 | 일본 근현대사 | 03 청일·러일전쟁 5
- 강의노트/책읽기 20분 2014-15
- 2017. 6. 12.
청일.러일전쟁 - 하라다 게이이치 지음, 최석완 옮김/어문학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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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일동맹을 맺으면서 일본은 러시아를 가상적국으로 설정하게 된다. “러시아와 맞서는 일본, 위에서 미는 영국, 배후에서 지켜보는 미국”
– 구미 각국은 아시아의 군사적 긴장에 의한 무역과 금융을 통해 1873년 이래의 대불황을 해소한다.
– 일본은 의화단 사건(1899-1901) 당시의 공동파병을 거쳐 구미열강(영제국, 미합중국, 러시아,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제국으로 성장
– “러일전쟁은 양국에게 싸우지 않아도 좋을 전쟁이었다.”
– 러일전쟁에서 얻은 戰訓: 군비확장을 도모해도 일본의 국력은 소모전을 견디지 못하므로 정신력으로 보완해야 한다; 장비의 충실보다 병사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突貫戰法에 기댄다; 현대전의 핵심인 포병운용의 문제점이 드러났으나 러시아를 이긴 것이 실패를 지웠다 — 이로써 “皇国獨特의 軍事學”이 성립
–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것은 제1차세계대전(유럽대전)의 전법에도 영향을 끼쳐, 독일식 火力主義와 프랑스식 白兵主義가 등장
– 러일전쟁 이후 일본은 ‘戰後가 戰前이 되는 시대’로 들어서게 된다. 이것의 遠因은 조선지배의 추구이다.
– 異法域으로서의 식민지 개념
우선 지난 시간에 정리했던 것은 청일전쟁에 이어지는 성과가 무엇인지를 정리했다. 일단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를 함에 따라서 군비를 집중적으로 확장하게 된다. 그리고 중요하게 설정되는 관점이 하나 있는데 일본과 영국 사이에 동맹이 설정됨에 따라 러시아를 가상적국으로 설정하게 된다. 이것은 영일동맹에 따라서 이뤄진 것이 굉장히 크다. 당시에 세계 제국주의 열강들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세력은 영국과 러시아였다. 이 대립구도 속에서 영국 편에 일본이 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하나의 독립적인 행위자로 아직 나설 수 있는 위력을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위력을 갖는다는 것이 상당히 어렵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경제력에 있어서는 어떻게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정치적인 세력이나 군사적인 우위를 갖는다는 것은 어렵다. 어쨌든 일본은 청나라를 이김으로써 아시아의 맹주가 되었다고 생각했고,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당분간 영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러일전쟁의 씨앗이 여기서 심어지는 셈. 그리고 일본에서 이런 전쟁을 벌이는 것을 구미 여러나라에서 그렇게 싫어하지 않았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258 1902년 1월 30일에 영일동맹이 조인되었다. 내용은 1) 청국 및 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 2) 제3국이 참전한 경우에만 동맹국과 협동하여 전투할 의무를 진다는 사실상의 군사동맹이었으며, 동시에 일본이 한국에 특수 권익을 갖는다는 점을 영국에게 승인시키는 것이었다.258 그림 7-4 러시아에 맞서는 일본(비고가 그린 그림엽서), 뒤에서 미는 것은 영국, 배후에서 지켜보는 것은 미국. 전쟁과 강화의 관계를 완벽하게 표현
265 러일전쟁은 양국에게는 싸우지 않아도 좋을 전쟁이었다.277 전쟁과 강화를 동시에 관찰하고 경계하면서 지구전을 수행하되, 상화에 따라 어느 한 쪽으로 흔들이를 밀어붙인다는 위험한 각의 결정이었다. 전쟁 전의 단기적 전략 구상은 일찍이 없었던 전쟁 전개에 따라 산산이 부서지고, 강화로도 넘어갈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었던 것이, 1905년 4월의 일본 정부의 정확한 위치였다. 사태를 움직인 것은 5월의 동해 해전(일본해 해전)이었다. 일본 해군이 일방적으로 승리한다는 세 가지가 동시에 맞아떨어져야만 가능한 예상외의 사건이 현실이 됨으로써, 우려되던 전쟁의 지구화는 거의 사라졌다. 강화가 서둘러진다.
299 1945년까지의 일본 사회는 전쟁의 연속인 시대였다고 회고되는 경우가 많다. 이를 다른 말로 바꾸면 하나의 전쟁이 끝나면 전후가 오지만, 실은 그 전후가 머지않아 전쟁을 맞이하는 전전이었다는 말이 된다. 다음 전쟁이 돌연 찾아오는 것이라면 중간 시기는 전후라고 할 수 있겠지만, 다음 전쟁을 위한 준비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라는 점에서 전전이라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이유에서 그와 같은 긴장의 연속을 사람들은 계속하고 있었던 것일까?299 청일 전쟁을 통해 대만을 청으로부터 빼앗아 식민지로 만든 것은 이 전쟁의 본래 목적이 아니었다. 일본 단독이냐 또는 구미 열강과의 공동관리냐 하는 문제는 차지하고라도 조선을 지배하에 두는 것이 전쟁의 목적이었다.300 일본의 조선 지배는 가혹하여 조선 민중은 압록강을 넘어서 중국 동북부(이른바 '만주지역')로 도망쳐 들어간다. 자립한 조선 민중이 '만주'에서 조선으로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저지하는 일이 일본의 과제가 되었다. 만주에 영향을 확대하여 조선 지배를 안정화시키는 일을 추구하게 되면서 군사적 해결도 선택 방안의 하나로 등장하는데, 그것이 1920~30년대의 일본의 모습이 되는 것이다.300 그와 같은 전환점이 청일전쟁이었다. 군사력이 국가와 사회에서 커다란 의미를 갖게 되는 것도, 따라서 작은 나라 일본이라는 사회가 극적으로 변화하는 것도 이 시기였다.
303 식민지 대만과 조선에 대한 일본의 정책은 '발달한 일본'의 기술과 자본을 '뒤처진 지역'에 옮겨 놓는 것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구미와 같은 '극악한 식민지 지배'와는 다르다는 변명이, 20시가 말 이래 일본에서 확산되고 있다. 지금까지의 상세한 연구에 따르면 그러한 '변명'은 일소에 부쳐질 낮은 수준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경제사의 연구에서 보면 대만은 제당과 남진의 거점으로 개발되어, 일본 내지의 생활을 충실히 하고 국토를 팽창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역할을 담당했다. 단순한 개발책의 실시가 아니었다.
303 또 '발단한' '뒤처진'이라는 표현의 근저에는 차별 의식이 드러난다. 한국병합은 부패한 조선 왕조에 그 책임이 있다면서, 일본이 적극적으로 식민지화를 목표로 움직인 사실을 은폐하고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의견도 보인다.304 1910년 이후의 일본은 대규모 식민지를 보유한 '대일본제국'이었다. 그곳에는 대일본제국헌법에 의해 수호된 '국민'과 그 보호 아래에 들어갈 수조차 없는 '국민'이 존재하였다.
305 근대 일본은 제국이라는 역사가 초래한 결과로서의 식민지를 왜 방기해야 하는지 라는 중대한 사상적 과제를 돌파하지 않은 채, 1945년의 패망이라는 이른바 '외압'에 의해 대만이나 조선을 손에서 놓게 됨으로써 안이하게 '식민지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렇게 된 역사적 경위를 곱씹어 숙고해 보아야만 한다. 그 출발점은 '청일전쟁에서 러일전쟁으로' 향하던 시기였다. 역사를 확실하게 찾아가는 일은 생각할 재료를 발굴하고, 사고를 넓혀 비약시키는 모험 여행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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