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찬: 생각하고 토론하는 서양 철학 이야기 2 ━ 중세-신학과의 만남


생각하고 토론하는 서양 철학 이야기 2 - 10점
박승찬 지음, 최남진 그림/책세상



들어가는 말


제1장 철학을 위한 준비운동

1. 중세 철학이란

2. 신앙과 이성으 조화를 추구하다

3. 신 아래 모든것이 통일된 세계


제2장 그리스도교와 그리스 철학의 만남 - 중세 철학의 태동

1. 교부 가라사대, 그리스도교야말로 진정한 철학이다

2. 그리스 철학의 수용을 완성하다 - 아우구스티누스

3. 고대 문화의 쇠퇴


제3장 새롭게 꽃피는 그리스도교 문화 - 스콜라 철학의 탄생

1. 카를 대제의 문예 부흥과 스콜라 철학의 탄생

2.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 - 캔터베리의 안셀무스

3. 개별적인 사물을 포괄하는 보편이 존재할까


제4장 신앙과 이성의 완벽한 조화

1. 유럽문화의 지형을 바꾸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부활

2. 서구 학문의 요람, 대학의 탄생

3. 스콜라 철학의 완성자 - 토마스아퀴나스

4.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판한 사람들


제5장 중세의 가을

1. 축제의 시대에서 기근의 시대로 - 중세의 몰락

2. 신앙과 다시 헤어진 이성 - 후기 스콜라 철학

3.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며




제1장 철학을 위한 준비운동

18 중세 철학을 아퀴나스로 대표되는 스콜라 철학과 동일시하는 학자들은 약 9~15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발전한 철학을 중세 철학이라고 본다. 이와 달리 역사학계에서는 서로마 제국의 멸망(476)을 고대의 종말로 보고 콘스탄티노플의 정복(1453)이나 종교개혁(1517)의 발달과 더불어 근대가 시작된다고 생각해서 이 사이를 중세로 보며, 이를 따르는 학자들은 5세기 말에서 15~16세기에 이르는 약 1,000년간 발전한 서양 철학을 중세 철학이라고 분류한다.


20 이 책에서는 원시 그리스도교 시대에서 유래한 교부 철학 시기와 스콜라 철학의 시기, 즉 2~15세기에 걸쳐 발달한 서양 철학을 통틀어 '중세 철학'이라 부르기로 하겠다.


22 다양한 중세 철학의 경향들은 일반적으로 이성에 기초한 철학적 진리와 계시에 기초한 신앙의 진리가 하나의 근원에서 유래하기 때문에 일치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둘 사이의 필연적인 조화를 추구하는 것을 공통된 근본 전제로 삼고 있다. 이런 입장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신에 따라 캔터베리의 안셀무스가 정식화한 "나는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와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라는 표현에 함축적으로 나타나 있다.


제2장 그리스도교와 그리스 철학의 만남 - 중세 철학의 태동

28 초기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체계화하고 확립하는 데 공헌한 학자들을 '교부(敎父)'라고 부르며, 교부들이 이룬 학문적인 성과를 교부 철학으로, 이들이 활동했던 2~8세기를 교부 시대라고 부른다. 바로 이 교부 시대에 서양 문명의 두 원류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 로마 문화와 그리스도교 문화의 융합이 시작되었다.


30 일방적인 그리스도 로마 문화의 공세 속에서 그리스도교를 옹호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호교론자'로 불리는 학자들이다. 이 중 가장 유명한 이가 유스티누스(100~164)이다.


31 그는 참된 철학자들은 그리스도교를 몰랐을지라도 그리스도교도라고 불릴 수 있다고 확신했다.


32 호교론자들에 의해 그리스 철학은 그리스도교에 수용되기 시작했다.


32 영지주의자들은 물질 세계를 악의 근원으로 보았고 이를 영적인 세계와 대립시키는 이원론적인 경향을 나타냈다.


32 영지주의에서 발달한 이단인 마르치온주의는 《구약 성서》와 《신약 성서》의 연속성을 거부하며 양자가 조화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33 마니교는 세상의 선은 선한 신에서 유래하고 악은 악한 신에게서 유래한다는 이원론을 주장했다.


34 그리스도교 신앙의 순수성을 보존하려는 이들, 특히 많은 순교자를 배출하며 열정적으로 신앙을 지켜온 북아프리카(현재의 알제리와 튀니지 지역)의 그리스도교인들은 그리스도교를 선포하기 위해 그리스 철학을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했다.


34 테르툴리아누스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라는 역설적인 표현으로 신앙의 고유성을 강조했다.


41 마니교에는 극단적인 금욕 생활을 해야 하는 '선택된 이들'과 이들의 명령에 순종해야 하는 대신 훨씬 자유로운 생활이 보장된 '청종자'의 역할이 나뉘어 있었다. 아직 육체적인 욕정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청종자로서 만족했다.


42 마니교의 독단적인 주장들에 의심을 품기 시작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얼마 동안 아카데미아파의 회의론에 호감을 느꼈다. 증명할 수 없는 불확실한 내용을 주장해서 오류에 빠지기보다는 일체의 '판단을 중지(에포케 epoche)'함으로써 오류를 피할 수 있다는 피론의 주장이 매혹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47 행복을 위해 소유하려는 대상은 무엇보다도 영속적이어야 하며 다른 이가 빼앗을 수 없게 자신과 필연적인 관계를 갖고 있어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오직 '신'만이 다른 모든 것에서 독립된 영원한 존재이기 때문에 변하지 않고, 만물의 창조자이자 모든 생명의 근원이므로 우리 존재와도 필연적인 관계다. 따라서 신을 소유할 수만 있다면 영속적인 행복이 가능하다.


52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윤리에서 관건은 사물들의 가치에 대한 학문적 지식이 아니라 질서를 이해하는 철학적 지혜와 이에 따라 올바로 사랑하고자 하는 의지다.


52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원하는 것을 행하라"라는 말에서처럼 그는 윤리의 핵심을 사랑에서 찾았기 때문에 그의 윤리학은 일반적으로 '사랑의 윤리학'이라고 불린다.


52 아우구스티누스는 우선 사람이 사물을 사랑하는 태도에 따라서 사랑을 두 종류로 구분한다. 그 사물 자체를 사랑하는 것을 '향유'라고 부르고,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 사물을 사랑하는 것을 '사용'이라고 한다.


55 아우구스티누스는 신플라톤주의자 플로티노스의 '악은 선의 결핍'이라는 개념을 이용해서 해결하려 한다. 그에 따르면 악이란 자연의 사물 같은 적극적인 실체가 아니고 어떤 사태 또는 우연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58 인류의 역사는 우연적이거나 운명론적인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신의 섭리가 개입하는 가운데 이루어지기 때문에 어떤 종말론적인 완성을 향하는 목표 지향적인 성격을 띤다.


59 플라톤 철학의 물질적 생성계와 인간 정신을 초월한 신에 대한 열망은 신의 나라에 대한 추구로, 조물주라는 개념은 창조주 사상으로, 플로티노스의 빛의 사상은 《신약 성서》의 말씀의 빛으로 승화 연결시켰다.


60 아우구스티누스는 신플라톤주의에서 만물은 '일자'에서 정신, 세계혼 등이 필연적으로 유출(흘러나옴)됨으로써 생성된다고 보는 것과 달리, 창조는 신의 절대 자유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주장했다.


64 그는 자신이 번역한 포르피리오스의 《이사고개》 라틴어 번역서를 주해하면서 세 가지 문제를 발견했다. 첫째, 유나 종, 즉 동물, 인간 등 보편적인 것은 존재하는 가 혹은 존재하지 않는가? 둘째, 만약 그것들이 자체로 존재한다면 물질적인 것인가 아니면 비물질적인 것인가? 셋째, 만일 비물질적인 것들이라면 그런 것들은 감각적인 사물에서 분리되어 존재하는가 아니면 감각적인 사물 안에 존재하는가?


66 보이티우스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근본적으로 일치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확신을 자신의 번역과 주해에 삽입한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해서 그는 중세의 전성기에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철학과 플라톤 - 아우구스티누스적인 철학을 종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66 보이티우스는 인격에 대한 정의로도 철학적으로 중요하다. 그는 "인격은 이성적 본성을 지닌 개별적 실체다"(《그리스도의 한 위격과 두 본성론》 3장)라고 정의했다. 


67 이 정의는 인간을 단순히 영혼과 동일시하거나 개체들이 지닌 물질적인 측면만 강조하는 두 극단을 모두 극복하고 포괄적으로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68 신의 인식은 미래에 있는 것에 대한 예지가 아니라 신에게 영원히 현재에 있는 것, 즉 결코 사라지지 않는 순간에 대한 인식이다. 그리고 현재에 있는 사건에 대한 인식은 그 사건에 필연성을 부과하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의 관점에서는 미래지만 신의 관점에서는 현재인 인간의 자유로운 행위에 대한 신의 인식은, 그 행위를 이미 결정된 필연으로 만듦으로써 자유를 빼앗지 않는다. "언제나 현재에 있는" 신의 직관이 지니는 그 영원성은 "미래에 있는 행위의 성질과 일치하고 있다."


제3장 새롭게 꽃피는 그리스도교 문화 - 스콜라 철학의 탄생

77 중세의 학문 연구는 주로 수도원이나 주교좌성당의 부속학교, 궁정 학교와 개인학교 등과 같은 여러 '학교 schola'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스콜라 철학'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스콜라 철학 시기는 보통 9~15세기를 말하는데, 이는 크게 3시기로 나눌 수 있다. 9~12세기까지의 초기 스콜라 철학은 본격적인 발전을 위한 예비적 단계이고, 13세기는 그때까지 알려진 모든 사상이 체계적으로 종합된 융성기였으며, 14세기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종합이 차츰 붕괴되는 후기 스콜라 철학 시기를 맞는다.


78 이로써 성서과 교부의 권위와 더불어 논리학 도구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신학의 내용을 합리적으로 체계화하려는 신학 연구 경향이 등장하게 되었다.


82 안셀무스는 영적 스승으로서 모든 계층을 깨우치기 위해 400통에 달하는 편지를 썼고, 자신의 명상을 기도와 시 등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의미를 지는 것은 철학과 신학에 대한 내용을 담은 작품들이다. 그의 최초 단행본인 《모놀로기온[독어록] Monologion》(1077)은 성서의 권위에 조금도 의존하지 않고 이성으로 모든 것을 증명하는 신에 관한 모범적인 명상록을 써달라는 동료 수사들의 요청을 받아들인 결과다.


82 이 책과 밀접한 관련성을 지닌 《프로슬로기온[대어록] Proslogion》은 안셀무스의 다른 작품들과 달리 신에게 기도를 바치는 방식으로 서술되었다.


84 《프로슬로기온》의 본래 제목인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은 스콜라 철학과 신학을 이끄는 좌우명이 되었다. 그는 믿음의 내용을 이성으로만 설명하려는 변증론자들에게는 반드시 신앙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고 강조했고, 신앙에 대한 이성의 개입을 완전히 거부하는 반변증론자들에게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믿고 있는 내용을 이성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에게 "믿음을 전제하지 않은 것은 오만이며,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태만"이다.


85 안셀무스는 학문적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시도한 최초의 학자였다.


86 《프로슬로기온》 2~4장에 제시된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어떤 것"이라는 개념이 그 가능성을 열어준 열쇠였고, 이를 통해 그는 더 이상 경험적인 사실에 의존하지 않는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을 제시했다.


91 그는 "신이 인간 본성의 미천함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받아들인 필연적인 근거들"을 찾으려고 노력하면서 라틴 세계의 독창적인 구원론, 즉 대속이론을 발전시켰다.


94 11세기는 로마를 중심으로 가톨릭 교회의 보편적인 성격이 강화되던 시기였다. 즉 가톨릭 교회는 단순히 신도들의 집합체가 아닌 보편적 교회로 독립적인 권위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보편의 실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단지 신도의 집합체에 지나지 않아 그 권위를 잃게 된다. 따라서 당시 교회에서는 보편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95 또한 인류라는 보편 실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한 개인의 죄가 어떻게 모든 인류에게 전수되며, 개별적인 인간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이 어떻게 모든 이를 구원으로 이끌 수 있는가를 설명하기 어렵다. 따라서 아담의 원죄도 그리스도의 구원도 실재하지 않게 되어 신앙의 기초는 허물어진다.


96 당대에 가장 유명한 논리학자였던 아벨라르두스 Abaelardus(1079~1142)가 두 입장의 중간적 위치에서 보편 개념의 실재성 문제를 명쾌하게 설명하는 온건 실재론을 내놓음으로써 논쟁은 일단락되었다.


96 결국 그는 보편 개념은 오직 정신 속에 존재하지만 개체들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본성을 지시한다고 주장했다. 보편자는 개체들의 공통적 종을 의미하며 이 공통적 종은 신기 개체를 신의 똑같은 관념에 따라 창조한 결과라는 것이다.


103 아벨라르두스의 논리학은 스콜라학에 의해 확실하게 수용되었다. 결국 신학의 진보를 가능하게 했고 13세기의 스콜라학을 쉽게 체계화하게 한 것은 바로 변증론을 신학에 적용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그가 《그렇다와 아니다》에서 사용했던 방법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에서도 드러나듯이 스콜라 전체에서 통용되는 일반적인 학문 탐구 방법이 되었다.


제4장 신앙과 이성의 완벽한 조화

108 13세기에 중세 스콜라 철학이 황금기를 맞은 직접적인 원인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재발견, 대학 설립, 수도회의 학문 활동 등을 들 수 있다.


109 12세기까지 논리학자로만 알려져 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이 전부 번역되면서 중세는 그리스도교 사상과 독립적으로 완성된 체계를 갖춘 철학과 직면한다.


115 1255년 3월 19일, 파리 대학 인문학부의 새로운 학사 규정이 발효되었다. 그때까지 알려진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작품을 수업에 사용해도 된다는 내용으로, 결국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리스도교 보수주의자들에게 승리한 것이었다. 이때부터 20년간 중세 철학과 신학은 황금기를 구가했다. 신학에서야 여전히 아우구스티누스가 위대한 스승으로 인정받았지만, 다른 학문 분야에서는 아주 단순하게 '철학자'라고 불린 아리스토텔레스가 논증과 토론의 최선의 안내자이자 모든 학자의 최고 스승이었다.


117 중세 초기의 교육기관에는 수도원 학교, 주교좌성당 학교, 왕실에 속한 궁중 학교 그리고 개인학교 들이 있었다. 12세기까지 우후죽순처럼 설립된 다양한 학교들은 1200년경부터 점차로 길드(장인 조합)와 유사하게 교수들과 학생들의 연합체로 조직화되었고, 13세기에 스콜라 철학의 융성기를 맞게 되는 틀로 작용했다.


123 스콜라 철학의 세 번째 요인은 대학의 등장과 거의 같은 시기에 새로이 설립된 탁발 수도회(프란체스코 수도회도미니쿠스 수도회)의 설립을 들 수 있다. 대학의 설립과 촉진된 학문적 발전은 새로운 개혁 수도원의 뛰어난 학자들이 여러 대학에서 강의하면서 더욱 활발해졌다.


126 나폴리 대학은 여러 대학에 영향을 미치고 있던 교황에 대항하기 위해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세운 대학으로, 당시 파리를 비롯한 많은 대학에서 금지되어 있던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식 교과목으로 채택되어 있었다.


126 1245년 가을에 파리에 도착한 그는 대 알베르투스라는 위대한 스승을 만나게 된다.


127 1257년에는 사상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꾸준한 우정 관계를 유지했던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보나벤투라와 같이 교수단에 들어갔다.


127 그는 1323년에 성인으로 선포되었으며, 1879년에는 그의 사상이 교황 레오 13세의 회칙 '영원하신 아버지'에 의해 가톨릭 교회의 공식 학설로 인정되었다.


130 대표적인 프란체스코회 수사 보나벤투라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신의 정신 안에 있는 이데아를 알지 못했고 이를 부인했던 점을 비판하면서, 신앙의 안내를 받지 못한 그를 참된 형이상학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131 이와 정반대로 브라방의 시제Siger로 대표되는 라틴아베로에스주의는 신학에서 독립적인 순수 아리스토텔레스를 주장했다.


131 이들은 온 세계의 영원성, 인간 지성의 단일성 등을 철학적으로 타당한 의견이라고 주장하는 한편, 철학과 신학의 관계에 대해 모호한 입장을 취함으로써 그 두 학문의 상반된 진리를 인정하는 이중 진리설을 주장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133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으로 대표되는 플라톤-그리스도교적 전통과 당시 재발견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 그리고 이와 함께 도전적으로 다가온 아랍 철학을 놀라운 방식으로 종합하는 데 성공했다.


134 이 책을 보통의 책 크기로 출판한다면 어림잡아 10,000쪽에 달할 것이다. 즉 200쪽 내외의 책으로 50권 정도니까 중간 규모의 백과사전에 해당하는 분량이다.


134 아퀴나스는 이 책의 머리말에서 이 방대한 작품은 인문학부에서 기초 교육을 마치고 상위 학부인 신학부에 진학한 신학 초보자들에게 그리스도교 교리를 교육하는 데 알맞도록 저술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136 중세의 토론은 아벨라르두스의 신학서 《그렇다와 아니다》에서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이론들을 대비시키고 그 안에서 진리에 가까운 내용을 찾아가는 방법에서 발전해나갔다.


137 "신이 주는 은총은 피조물들이 지니고 있는 본성을 말살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하는 것이다."


137 계시된 진리와 이성의 진리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진리가 아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계시와 철학적 진리를 서로 경쟁적이지 않으며, 보완적일 뿐이다.


139 아무런 전제 없이 순수하게 이성적인 추론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했던 안셀무스의 존재론적 증명과 달리 토마스 아퀴나스는 우리가 일상적인 생활에서 만나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경험적인 사실에서 출발하여 이성적인 추론의 도움으로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하려 한다.


148 피조물에게 사용하는 단어와 신에게 사용하는 단어가 일의적이라면 신의 초월성이 위협받아 범신론에 빠질 위험이 있고, 완전히 다의적이라면 신에 대해 어떠한 진술도 할 수 없게 되어 불가지론(인간은 신을 인식할 수 없다는 종교적 인식론)에 빠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아퀴나스는 제3의 길로서 유비적인 방식이야말로 인간이 하느님에 대해 올바로 진술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라고 제시했다.


151 윤리적 행위를 위해서는 주관적 기준의 의도의 선함만이 아니라 선한 대상을 식별하는 개관적 기준이 필요하다.


151 도덕 영역에는 '선을 행하고, 악은 피하라'는 윤리의 으뜸원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159 1277년의 단죄는 이후 중세철학과 신학의 흐름을 바꾸어놓았다.


160 중세 철학자인 질송에 따르면 1277년의 단죄는 중세 철학 및 신학사의 이정표이며 이로써 스콜라주의의 황금기는 막을 내렸다.


160 그 중 단연 주목을 끄는 학자는 보나벤투라를 능가하는 프란체스코회의 스승이라고 인정받는 둔스 스코투스(1266~1308)이다.


161 존재 개념은 근본적으로 어떤 경우에든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는 일의성을 지닌다고 주장했다.



제5장 중세의 가을


168 중세 전성기였던 12세기와 13세기가 축제의 시대였다면 14세기부터 시작되는 중세의 가을은 기근과 재앙의 시대였다.


168 이런 상황에서 가장 끔찍한 자연 재앙이 덮쳤으니, 그것은 엄청난 숫자의 서유럽 인구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페스트라는 이름의 질병이었다.


168 평화로운 동정녀 마리아가 중세 전성기를 상징했다면, 서양식 낫을 들고 사람들을 노리는 해골의 모습은 중세의 가을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176 유럽 사회를 휘감은 재앙의 물결은 시민들의 삶과 문화까지도 철저하게 변화시켰다. 중세 말기에 들어서면서 나타난 사치품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일종의 도피주의라고 볼 수 있다.


180 윌리엄 오컴의 사상사적 의의는 그가 토마스 아퀴나스둔스 스코투스 등에 의해 정립된 스콜라 철학이라는 위대한 체계의 비판자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오컴은 둔스 스코투스가 먼저 발걸음을 내디딘 개체성에 대한 강조와 비판 정신을 더욱 극단적으로 전개해나갔다. 그러나 오컴은 보편자의 중요성을 포기하지 않는 스코투스가 "너무 많이 증명하려 한다"고 하여 그를 "옛 사람에 속한다"라고 명시적으로 비판했다.


182 그에 따르면 우리는 인식함에 있어서 외계 대상에 대한 감각적 직관이나 우리의 내적 심적 작용에 대한 정신적-반성적 직관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


182 우리 인식은 근본적으로 외부의 개별 대상과 정신 두 요인이 결합된 결과일 뿐이다.


182 그에 따르면 실재는 전적으로 개체적인 것뿐이다. 보편 개념은 정신의 작용에서 발생하는 주관적 존재이며 다수의 실재적 대상들의 기호이다.


184 그를 지지하는 오컴주의자들은 소위 '근대파moderni'를 형성해서, 전통적인 아퀴나스주의 및 스코투스주의의 실재론을 따르는 '고대파antiqui'와 격렬하게 대립했다.


186 오컴은 신앙의 신조는 결코 논증할 수 없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즉 그는 인간 이성이 신앙의 진리를 탐구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는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한 것이다.


186 신비주의와 유사하게 오컴과 유명론에 속하는 저자들은 윤리적인 선을 배타적으로 행위자의 의도에서 찾았다.


186 오컴은 신의 절대적 자유를 철학적·신학적 설명의 원리로 자주 사용했다. 신이 모든 피조물을 오직 자신이 원했기 때문에 창조한 것처럼, 그는 피조물을 자기 마음에 드는 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187 독일 도미니쿠스회 수사였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1260? ~ 1327?)는 그리스도교와 신플라톤주의 양쪽에서 영감을 받은 사변적 신비주의를 발달시켰다.


191 신비주의는 신 자신이 모든 사물의 마음, 무엇보다 인간의 마음에 드러나도록 끊임없이 사고하는 노력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의 강론 초점은 단순한 현실 탈피나 기괴한 예식으로 초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삶의 세계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었다.


196 신앙과 이성의 일치라는 확신으로 철학적인 기초하에 신학을 세우는 것이 목적이었던 스콜라 철학은 신학과 철학의 완전한 분리를 주장하는 오컴에 이르렀을 때 사실상 붕괴되었다.


199 루터는 오직 신앙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으며 로마 교회와 같은 인위적이고 외면적인 형식주의로는 참다운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주장을 펼쳤다.


199 종교개혁의 또 다른 대표자인 칼뱅은 인간의 구원에 대한 예정설을 주장했다. 그는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얻기 위해서는 직업 노동에서 성공해야 하며, 그러려면 금욕적인 생활을 해야 함을 강조했다.


202 이성 또한 신에게서 받은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믿고 있는 신앙을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정당할 뿐만 아니라 필수적이다. 물론 인간의 이성을 절대화해서 초월적인 절대자를 만나는 데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되지만, 현실적인 종교에 대한 비판적인 성찰은 종교 자체를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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