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G. 크릴 : 공자 ━ 인간과 신화


공자 - 인간과 신화 - 10점
H.G. 크릴 지음/지식산업사

譯者의 말

著者序


I. 背景 배경

II. 孔子 공자

III. 儒敎 / 유교

後記 / 후기





35 주 왕조가 해를 거듭할 수록 초대 제후들의 자손들은 조상들과는 달리 더 이상 상호협력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게 되었으며, 점점 더 왕의 명령을 무시하게 되었다. 그들 상호간의 전쟁은 더욱 빈번하여졌으며 강대국은 약소한 이웃 나라의 영토를 병탄하였다. 공자가 나기 220년 전인 기원전 771년, 봉건 제후들과 '이적(夷狄)'의 연합군이 주의 서도를 공격하여, 왕은 살해되었고 '서주' 시대는 종말을 고하였다. 그 후의 왕들은 동쪽으로 왕도를 옮겼는데, 오늘날의 허난성 뤄양이 바로 그곳이다. 이 때문에 이 이후의 시대를 '동주'로 부르는데, 동주의 왕들은 일부 제후들의 보호 아래 낙양에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대제후의 손아귀에 들어 있는 꼭두각시에 불과하였다.


82 그는 노국의 정치를 개선하는 데도 성공하지 못하였고, 원하던 것처럼 권력을 장악해보지도 못하였다. 가장 훌륭한 제자들은 죽었고, 남은 제자들은 뛰어나게 유망하지도 못하였다. 그는 자신의 이상이 명료하게 후세에 전해지는 것도, 또 그것이 정력적으로 실천에 옮겨지리라는 것도 기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공자가 자공에게 "아아!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구나!"라고 한탄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92-104

자로가 제자 가운데 최연장자였다는 설은 거의 확실한 것 같다. 그는 공자의 제자라기보다는 '가장 친한 친구요 가장 엄격한 비판자'처럼 보인다. [...] 염구도 초기 제자 가운데에서는 역시 뛰어난 인물이었지만 거의 모든 면에서 자로와 상반된 사람이었다. 그는 과도한 정열 때문에 고민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반대로 그것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그를 자극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공자가 말할 정도였다. [...] 보다 행복한 중용의 덕을 갖춘 사람은 자공이었다. 그는 운 좋게도 아첨하지 않고도 출세할 수 있는 재주를 가졌던 것 같으며, 외향적인 성격과 내성적인 성격을 겸비한, 그야말로 잘 적응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 <논어>를 보면 자공이 공자와 매우 친밀한 사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나이와 능력 탓도 있었겠지만 바로 이 사실 때문에 공자가 죽은 뒤 자공이 상례의 주재자로 추대된 것 같다. [...] 공자의 애제자 안회는 평가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그에 관한 언급은 많지만, 그것을 종합해 보면 덕목의 나열에 불과하다. [...] 재여는 순전히 반항심 때문에 유명해졌는데, 그는 공자의 교훈을 위반하였을 뿐 아니라 은근히 그것을 조롱하기까지 하였다. [...] 제자들 가운데서 다소나마 교사활동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확실하게 가려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이 문제에 관해서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것도 맞지 않는 것 같다. 그 누구보다도 증거의 중요성을 잘 안 것처럼 보이는 최술은 자유, 자장, 자하, 증삼을 주요 전파자로 생각했다. [...] <논어>에 유약이 세 번씩이나 '유자'로 언급된 것을 보면 그가 문하생을 거느리고 있었던 것 같지만, 그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 자유에 관해서는 이보다 약간 많은 것이 전하고 있다. 그는 문학에 재주를 보인 것으로 칭송되었지만, 다른 후기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특히 의례에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 자장은 후기 제자 가운데에서 가장 정력적인 사람처럼 보이는데 실제로 공자도 그가 매사에 '지나치다'는 결함을 가졌다고 지적한 적이 있다. [...] 자하는 다소 현학적인 사람처럼 보인다. <논어>에는 자하가 문학에 뛰어난 사람으로 칭송되어 있다. [...] 커다란 영향을 주었던 또 한 명의 제자는 증삼이다. <논어>에서는 그가 보통 증자로 불리고 있는데, 이것은 그이 제자들이 그를 부른 호칭이었기 때문에 증삼의 학파가 <논어>를 편찬하는데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는 종래의 주장도 전혀 근거가 없는 것 같지는 않다.

 

107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공자의 제자 가운데에는 미천한 출신도 있지만, 공자는 이들을 명실공히 지배능력을 갖춘 사람으로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제자들이 지향해야 할 이상적인 인간형을 공자가 '군자'란 말로 표현한 것은 아마 이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 말은 문자 그대로 '군주의 아들', 즉 군주의 친척을 의미하며, 따라서 귀족의 성원을 뜻하는데, 이런 의미에서 '소인', 즉 평민과 대비되는 말이다.


113 '예'라는 한자는 신령에게 바치는 귀한 물건을 담는 제기를 표현하는 상형문자이다. 이 문자의 최초 의미는 '제물을 바친다'는 것이 분명하며, 아직도 이 의미가 남아 있다. 이 의미를 조금만 확대하여도 제사에 사용되는 제의라는 의미도 될 수 있다.

이것이 더 발전된 형태는 더욱 복잡한데, 이것을 이해하려면 고대 중국에서는 '종교적'인 행위와 '세속적'인 행위가 크게 구분되지 않았다는 것을 먼저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실제로 그것은 거의 떼어놓을 수 없을 정도로 뒤섞여 있으며,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구분하는 선도 명확하지 않았다. 


115 '예'에는 제의를 행하는 형식도 포함되어 있지만, '내부의 정신적 인심이 밖으로 표현되었을 때'만 비로소 그 가치가 있으며, 진정으로 인심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예'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다. 공자는 "마음 속으로는 전혀 경외심도 없는 사람들이 단지 형식만 갖추는 예를 나는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고 말했으며, 죽은 사람을 위한 상례에도 모든 격식을 세세하게 지키는 것보다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슬픔이 더 중요하다고 선언하였다. 


116 '예'를 두 단어로 정의한다면 아마 '좋은 취향'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좋은 취향이란 물론 어떤 상황에서도 적절한 행동을 하는 것인데, '예'가 바로 그런 것이다. <예기>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예는 적합한 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어떤 관행이라도 이 적합성이란 기준에 맞으면 선왕의 관례에는 없는 것이라도 채용될 수 있다."


122 공자는 제자들에게 '사(士)'의 이상을 제시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본래 이 용어는 단순히 청년을 의미하였던 것 같은데, '무사'를 의미하게도 되었고,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과정을 거쳐 '귀족'을 의미하게도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사'란 단어는 유럽의 기사(Knight)란 말과 매우 비슷하다. 둘 다 최하층 귀족을 의미하는데, 이들은 대체로 무사였다. 


123 공자는 제자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직업을 최상의 직업으로 느끼도록 만들었다. 그에 대한 보수로 공자가 말한 것은 마음의 평안과 정신적 희열감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가 어떤 것보다 가치있는 일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확신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그 의무는 막중하였다.


232 중국에서 위서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적어도 주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명백하지만 이런 방식의 위작은 공자시대나 공자가 죽은 직후에야 비로소 성행하기 시작한 것 같다. 앞에서 지적하였지만 맹자시대가 되면, 진위가 의심스러운 문헌이 너무나 많아 맹자도 "역사문헌을 모두 믿는다면, 차라리 그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 낫다"고 말할 정도였다.


238 맹자 자신은 공자의 사상을 그렇게 심하게 곡해하지는 않았지만 <맹자>라는 책은 공자를 곡해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 이유는 <맹자>가 유가철학을 논한 최고(最古) 최장(最長)의 현존문헌이고 논지도 명료하고 맥락도 잘 연결되었을 뿐 아니라, <논어>보다도 훨씬 이해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239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도가서 가운데 가장 중요한 책은 <노자>와 <장자>이다. 전통적인 견해에 따르면 <노자>는 (<도덕경>이라고 한다) 공자보다 약간 나이가 많은 노자라는 사람이 저술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노자는 아마 설화적인 인물이고, <노자>가 저술된 것도 아무리 빨라야 맹자시대 정도라는 증거가 제시되었다. 후자의 견해가 옳은 것은 분명한 것 같으며, 비록 논쟁이 지속되고 있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견해를 지지하고 있는 것 같다.


247 이미 여러 번 언급하였지만, <좌전>은 아마도 주대(周代)에 관한 유일하고도 가장 중요한 자료로서 옳고 틀린 정보가 가득 찬 금광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몇몇 학자들은 각종 판단 기준에 근거하여 <좌전>의 편찬연대를 대체로 기원전 300년 전후의 시기로 결론짓고 있다. 이 책은 현재 <춘추>에 대한 주석서의 성격을 띠고 있고, 또 그렇게 여겨왔으나, 많은 학자들은 지적한 바와 같이 <춘추>와는 무관한 점이 많고, 오히려 그 이전에 있었던 여러 문서에서 자료를 뽑아 집성한 것처럼 보인다.


256 맹자가 모든 사람의 천성이 한결같이 선하다고 말한 것에 비해, 순자는 인간의 천성이 모두 악하다고 말하였지만, 두 사람 모두 만인을 동일한 차원에 놓은 점에서 일치한다. 순자가 세습적인 신분보다는 능력을 근거로 지위를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한 젊은 맹자보다 일보 진전한 것처럼 보이지만, 순자는 그 근거가 무엇이건 간에 계급차별에 대한 강한 신념을 갖고 있었으며, 그것이 선량한 질서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260 도가와 법가가 지식을 독소적인 요소로 간주하고 그 책임을 유가에 돌린 것은 정확한 판단이었지만, 이 지식의 물결은 중국에서도 비교적 문화가 높은 지역에 이미 너무나 철저하게 파고들었기 때문에, 아무리 법가가 열심히 노력하여도 역사의 방향을 되돌려 놓을 수는 없었다. 역사가 일별할 때, 전체주의는 전제적인 지배와 규율에 복종하는 것이 오랫동안 습관화된 사회가 아니면 실제로 거의 성공한 예가 없다. 따라서 중국에서 가장 문화적으로 발전하였고 새로운 자유의 발달을 경험한 지역에서 법가사상이 발생하지 않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265 '분서(焚書)'의 결과 상실된 문헌의 양도 아마 과장된 것이며, 진대에 유교를 박해한 것도 유교운동을 약화시켰다기 보다는 오히려 강화시켰던 것 같다. 법가 사상이 유교에 가한 진정한 타격은 유교를 박해한 것이 아니라 유교를 왜곡시킨 점이다. 한대의 권위주의적인 정통유교의 성격에 실제 법가사상의 요소가 상당히 많은 점은 때때로 지적되어 왔으며,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순자의 귄위주의적인면이나 사회통제 수단으로 형벌을 용인한 점은 법가사상의 경향을 띤 것이다. 실제 법가사상은 장기간에 걸쳐 유가사상에 부단히 침투되었다.


302 정치에 기친 유교의 영향은 시대에 따라 강도가 달랐지만, 그 영향은 구석구석 스며들었고, 대체로 민주주의라고 할 만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정부란 백성의 만족과 복리를 위하여 존재하며 그 책임을 수행하지 못할 경우, 비판은 물론 전복되는 것조차 당연하다는 이론이 지난 2천년간 이처럼 계속 일반화되었던 대국(大國)은 아마 유례가 없을 것이다.


303 외부 침략자들이 세운 왕조의 경우만은 예외라는 것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시험경쟁을 시키지 않고 동족에게 최고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당연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요한 조건이 완비된 뒤에는 교육을 통해 유교의 이상에 젖은 관료가 대체로 중국을 지배하였고, 그들은 일반백성 가운데에서 시험을 통하여 선발되었다. 


303 이러한 결함에도 불구하고 이 시험제도 때문에 중국의 정치는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독특한 것이 되었는데, 그 정치에는 많은 장점이 있다. 이 시험제도 때문에 중국에서 가장 유능한 사람들이 관계에 대거 진출할 수 있었으며, 이 제도가 효과를 발휘하는 한, 관리는 지위를 세습한 망나니에 불과한 존재가 아니라 교양인임을 보장하였다.  바로 이 제도의 기초가 유교철학과 윤리였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의 이상을 공유한 집단을 형성하였으며, 여기서 특이한 집단의식이 생겨났다. 비록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정치적 민주주의라고 생각하는 것에는 미치지 못한다 할지라도, 매세대마다 그 일부는 항상 공직을 획득하였기 때문에 일반백성들은 정부에 일종의 대표단을 갖게되는 셈이다. 교육받은 사람의 신분이 자동적으로 상승되는 것은 아니므로, 이 시험제도가 계급 없는 사회를 만든 것은 아니지만, 그토록 장기간에 걸쳐 그토록 거대한 나라에 어느 정도 사회적 민주주의가 실현된 예는 아마 또 없을 것이다.


316 여기서 요점을 다시 정리해 보자. 중국철학은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의해 유럽에 소개되었으며, 그들이 주로 보고한 것은 그들이 최선으로 생각한 것, 즉 공자 개인의 사상과 초기 유교사상이었다. 이 철학은 성격상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영향을 가졌기 때문에 다른 세상에서 온 혁명의 복음처럼 환영받았다. 그러나 얼마 뒤에 유럽인들은 유교의 후세 형태에 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것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군주권의 목적에 봉사하도록 공자철학의 일부를 전도시킨 것이다.


324 그렇다고 중국에 대한 새로운 지식이 프랑스혁명의 '원인'이 되었다고 결론을 내려도 좋은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프랑스혁명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지적인 많은 요인에 의해서 일어났지만, 그것을 철저하게 검토하는 것은 이 책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다. 프랑스에 관한 이 책의 관심은 혁명 그 자체보다는 17,8세기에 서구 전체 사유를 민주주의 방향으로 점차 재조정하였던 정신적 혁명의 측면이다. 유교에 대한 지식도 이 정치적 혁명의 배후에 깔려 있는 많은 요인 가운데 한일 뿐임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327 유럽인들이 유럽의 민주주의적인 유산에 중국이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는지 잘 모르는 것이나 대다수 미국인들이 미국의 민주적인 사상과 제도의 발전에 18세기 계몽주의 철학, 특히 프랑스철학이 끼친 영향을 잘 모르는 것은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미국혁명이 프랑스혁명보다 먼저 일어났고, 프랑스혁명이 터지는 것을 도와주었다는 사실 때문에 이점은 잊기가 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은 미국혁명이 준비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을 뿐 아니라, 혁명 후 미국 민주주의 사상의 발전에는 더 큰 역할을 한 듯하다.


343 추상적인 원리로서의 민주주의를 찬성하는 사상가라고 해서 더 어려운 민주주의의 여러 요건을 충족시킬 만한 일관성 있는 철학을 모두 제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바로 이 때문에 그의 사상이 그토록 광범위한 지지를 받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공자철학이 완전히 근대적인 의미에서 민주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지나칠지 모르나, 반면에 공자를 민주주의 선구자, 즉 민주주의의 길을 준비한 광야의 외침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그렇게 지나친 표현만은 아니다. 더욱이 그는 인간 상호간의 성공적인 협동에 기초가 되는 몇 가지 기본적인 원리의 진가를 알고 있었다. 이 점에서는 그를 능가하는 철학자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비견될만한 사람도 드물다.


345 공자는 인간을 신뢰하였다. 물론 그는 모든 사람을 다 신뢰할 정도로 순진무구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인간은 대부분 성실한 존재라고 믿었다. 그는 모든 사람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협동적인 국가의 진정한 구성원으로 만들기 위하여 모든 사람에게 일정한 교육을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그 가운데에서 유능하고 유덕한 자질을 보인 사람들은 더 많은 교육을 시킨 뒤 권력 있는 자리에 앉히자고 제안하였다. 일단 그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자지가 생각하는 최선의 판단에 따라 정치를 해도 좋다는 것이 공자의 생각이었다. 그는 장기적으로는 일반 백성도 관리의 잘잘못을 판별할 수 있을 것으로 믿은 것이다.

공자는 인류를 신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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