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주의의 뿌리 | 02 계몽주의에 대한 최초의 반격
- 강의노트/라디오인문학外 2013
- 2013. 6. 3.
강유원의 낭만주의의 뿌리 강의 2
강의 교재: 이사야 벌린의 <낭만주의의 뿌리>
강의 목차: 1강 낭만주의의 정의를 찾아서
2강 계몽주의에 대한 최초의 반격
3강 낭만주의의 진정한 아버지들
4강 억제된 낭만주의자들 (1)
5강 억제된 낭만주의자들 (2)
6강 해방된 낭만주의
7강 지속되는 영향력
8강 지속되는 영향력
도서목록: 아르놀트 하우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3권
헤르더: 인류의 역사철학에 대한 이념
비어슬리: 미학사
2006년 여름 풀로엮은집
낭만주의 강의
강사 : 강유원
필사 : 이재만
교재 : 이사야 벌린,『낭만주의의 뿌리』(The Roots of Romanticism), 이제이북스, 2005
2강 계몽주의에 대한 최초의 반격
오늘은 세 가지를 이야기한다. 첫째, 서구 사상 전통에서 핵심적인 내용, 그리고 그것과 계몽주의의 관계에 대해 말한다. 둘째, 계몽주의에 미세한 파열음을 낸 몽테스키외와 흄에 대해 말한다. 셋째, 독일 낭만주의 형성의 핵심적 배경에 대해 말하는데, 그 와중에 간략하게 헤르더와 하만이 거론된다. 다음주에 헤르더와 하만에 관해 본격적으로 다룬다.
먼저 책 한 권을 소개하겠다. 헤르더의『인류의 역사철학에 대한 이념』(책세상)이다. 책세상 고전의세계 시리즈 중 한 권이다. 아주 얇은 책이다. 오히려 해제가 더 길다. 이번주와 다음주에 헤르더에 관해 듣고 읽으면 그냥 읽힌다. 철학책이 아니라 에세이다. 이 책에 관해 칸트가 쓴 서평도 있다.『칸트의 역사철학』(서광사)에 실려 있다. 요즘은 주례사 서평이지만, 옛날 서평들을 보면 아주 심각하다. 거의 밟아대는 분위기다.
“17세기 말부터 18세기 초의 계몽주의는 정의해 둘 필요가 있다. 이렇게 압축해도 좋다면, 서구에는 세 가지 기본 명제, 즉 서구의 전통 전체를 지탱해 온 세 개의 기둥이 있다. 그것들은 계몽주의 시대에만 한정되지 않으나, 계몽주의는 그것에 특정한 형태를 부여하고, 그것을 특정한 방식으로 변형시켰다.”(41쪽)
이 부분을 읽으면서 예측해야 한다. 세 가지 기본 명제가 있는데, 이제부터 그것들이 계몽주의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이야기하겠구나, 하고 짐작해야 한다.
“첫째, 모든 진정한 질문에는 대답이 존재하며,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은 질문이 아니다,”(41쪽)
이 문장에서 핵심적인 단어가 무엇이겠는가? ‘진정한’(genuine)이 중요하다. ‘진정한’ 질문에만 대답이 존재한다. 질문이 진정하지 않으면 대답도 없다. 질문과 대답은 어느 경우에나 쓸 수 있지만, 어떤 것이 진정하느냐는 어떤 사유양식으로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쉽게 말해 패러다임이 다르면 서로 진정한 질문을 공유할 수 없다.
“이것이 기독교도와 스콜라 철학자들, 계몽주의와 20세기의 실증주의 전통에 모두 공통되는 명제다. 실로 그것은 주요 서구 전통의 뼈대이며, 낭만주의가 균열시킨 것도 바로 이것이다.”(42쪽)
기독교와 스콜라 철학은 서로 공통되는 점이 있다. 그런데 계몽주의 하면 우리 머릿속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핵심적인 내용이 반종교주의다. 그렇다면 어떻게 계몽주의와 스콜라 철학이 공통되는 명제를 가질 수 있단 말인가? 더군다나 20세기 실증주의 전통은 계몽주의에서도 더 많이 나아간 것이다. 여기서는 질문이나 대답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문제를 설정하는 방식과 그 문제에 대답하는 방식은 사조마다 다르게 설정될 수 있는데, 그러한 방식만 제대로 세워져 있다면, 그것이 합리적인 것이든 신앙적인 것이든, 질문과 대답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문제 설정 방식을 공유하는 집단들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벌린은 계몽주의와 낭만주의는 서로 교류할 수 없는 이질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지금 한미FTA 때문에 나라가 난리다. 노무현 대통령 및 그를 중심으로 하는 집단과 한미FTA를 반대하는 집단은 서로 대화가 안 된다. 왜? 문제를 설정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용하는 용어도 다르다. 예컨대 ‘국익’이라는 말을 서로 다르게 사용한다.
내 친척 중에도 나와는 정말 다른 패러다임을 가지고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많다. 어떤 사람은 나한테 너는 왜 그렇게 돈 안 되는 책을 쓰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도저히 대화가 안 된다. 그들은 낭만고양이 노래는 알지만『낭만주의의 뿌리』 같은 책을 번역한다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
‘기독교도와 스콜라 철학자들’이 한 묶음이고, ‘계몽주의와 20세기의 실증주의 전통’이 또 한 묶음이다. 이 둘 사이에 ‘,’가 있다. 이 콤마를 사이에 두고 왼쪽과 오른쪽에 있는 것들은 서로 통약 가능하지 않다. 通約可能性(통약가능성), 서로 약속이 통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내가 한 달 전에 이사를 했다. 내가 4층에 살고 전에 살던 전셋집 주인 아줌마가 3층에 살았는데 서로 대화 안 된다. 아래층에 사니까 문제가 있을 때 가서 상식적으로 이렇지 않냐고 말하면 뭐라고 하는지 아는가? 저는요, ‘상식’이 아니라 ‘기도’로 삽니다, 이런다. 계몽주의와 낭만주의는 ‘상식’과 ‘기도’의 관계에 해당한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것이 더 낫다는 말은 아니다.
“둘째 명제는, 모든 답은 알 수 있고, 타인에게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수단을 통해 발견되며, 어떤 기술이 있어 그것으로 세계가 무엇으로 구성되었는지, 그 안에서 인간은 어떤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지, 우리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는 무엇이고, 사물들과의 관계는 무엇이며, 진정한 가치는 무엇인지, 또 나머지 모든 진지하고 대답 가능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아내는 방법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42쪽)
이것은 첫 번째 명제에서 도출된다. 이 명제는 방법론의 문제에 해당한다. 합리적인 사유방식을 가진 사람들은 누구나 이것에 관해 동의한다. 가끔 내 홈페이지 게시판에 멋진 글을 쓰는 분들이 계시다. 도(道)를 튼 분들이 가끔씩 오셔서 게시판 데이터 베이스 용량을 잡아먹는다. 내가 거기서 항상 발견하는 것은, 그런 도는 가르치고 배울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두 번째 명제를 유심히 봐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어떤 학설 이론을 평가할 때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기준이다. 우선 타인에게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것인지, 그 철학자의 세계관은 무엇인지, 인간론은 무엇인지, 인간과 인간의 관계 및 인간과 사물(thing)의 관계는 무엇인지 등을 물어야 한다. 이런 것들이 하나의 원리 속에서 일관성 있게 전개되어야만 우리는 그 사람을 제대로 된 철학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도사님이다.
“셋째 명제로 모든 대답들은 서로 모순되지 않아야 하는데, 만일 그것들이 서로 모순된다면 혼돈이 야기되기 때문이다.”(42쪽)
이 세 가지가 서구 전통에서 일반적으로 전제되어 온 기둥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바탕 위에서 계몽주의는 어떻게 자기 나름대로 문제를 설정했는냐가 우리가 두 번째로 논의해야 할 문제이다. 이 때 계몽주의의 바탕에 놓여 있는 핵심적 원리를 찾아내야 한다. 그것을 바탕으로 문제를 설정하고, 세계를 설명하며, 인간에 대해 이해하려 하고, 가치 판단을 내린다.
“계몽주의가 이 전통에 가져온 특별한 반전은, 이제까지 대부분의 전통적 방식들 -이미 잘 알려져 있을 테니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 로는 그 대답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한 점이다. 그 답은 계시로도 얻지 못하니, 여러 사람들이 받은 계시가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까닭이다. 그것은 전통으로도 얻지 못하니, 전통은 종종 인간 을 현혹시키는 거짓으로 나타나기도 하는 까닭이다. 그것은 도그마로도 얻을 수 없고, 권위를 가진 인간의 개인적인 자기 성찰을 통해서도 얻을 수 없으니, 너무 많은 사기꾼들이 이 역할을 불법으로 행사해 온 까닭이다 - 나머지 다른 방식들도 마찬가지였다. 대답을 발견하는 단 하나의 방법이 있다면, 한편으로는 수학적 학문에서처럼 연역적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과학에서처럼 귀납적으로, 이성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이다”(43쪽)
계몽주의가 배척한 것은 계시, 전통, 도그마, 권위 같은 것들이다. 계몽주의의 방법은 우선 “한편으로는 수학적 학문에서처럼 연역적으로”, 즉 제1원리를 만들어낸 다음 그것으로부터 모든 것을 모순 없이 이끌어내는 것이다. 다른 방법은 “자연과학에서처럼 귀납적”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인식론에서 연역을 사용하는 것이 합리론이고, 귀납을 사용하는 것이 경험론이라고 알고 있는데, 계몽주의는 이처럼 합리론과 경험론 둘 모두를 포괄하는 시대사조다. 이걸 유념해 두어야 한다.
계몽주의는 철학적 유파가 아니며, 어찌 보면 시대정신이다. 계몽주의의 핵심 원리는, 연역이든 귀납이든, “이성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이다”. 계몽주의는 이성을 올바르게 사용한다는 문제 해결 방식을 설정한 다음, 다음과 같은 것에까지 그것을 적용한다.
“이것이 일반적인 대답, 곧 진지한 질문에 대한 진정한 대답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물리학과 화학 분야에서 찬란한 승리를 거두어 낸 이러한 대답들이 훨씬 골치 아픈 분야인 정치학이나 윤리학, 미학에 똑같이 적용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43쪽)
학문이 다섯 개 거론되었다. 그 순서를 보면, 1) 물리학, 2) 화학이다. 여기서 찬란한 승리를 거두어 냈으니, 계몽주의는 자연과학적 설명 모형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정치학, 윤리학, 미학에 적용한다.
토마스 홉스의 경우 출발점이 생리학이다. 여기서부터 시작해서 ‘리바이어던’이라는 인공 국가까지 설명한다. 홉스에게는 Good(善)과 Bad(惡)이 있는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선과 악에 관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홉스는 나의 쾌락에 도움이되는 것을 ‘선’이라 하고,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악’이라 한다. 홉스가 인간을 설명하는 최소 단위는 Conatus(충동)이다. 이것이 뻗어나가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모두 도덕적으로도 정당화될 수 있다. 이런 것이 계몽주의의 기본적인 태도이다.
“계몽주의는 분명, 간혹 그렇게 유지된 적도 있었으나, 모든 계몽주의자들이 대체 로 비슷한 신념을 지닌 단일한 운동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인간 본성에 관한 의견은 매우 광범위하게 나뉘었다. 퐁트넬과 생테브르몽, 볼테르와 라 메트리에게, 인간은 구제받을 길 없이 질투와 시기로 가득 찬, 사악하고 나약하며 타락한 존재였고, 따라서 단지 살아남기 위해서는 최대한 혹독한 규율이 필요했다.... 루소처럼 인간의 본성은 악하지도, 중립적이기도 않은 선한 것이며, 다만 스스로 만든 제도에 의 해 타락했을 뿐이라고 말한 이들도 있었다.... 또한 계몽주의 시대의 몇몇 탁월한 이론가들은 영혼의 불멸을 믿었다.”(46쪽)
지금 계몽주의는 단일한 운동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연역과 귀납을 바탕으로 올바른 이성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까지 부인한 것은 아니다.
“이것이 모든 계몽사상가들이 품고 있던 신념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자연과학자들이 18세기의 위대한 승리를 거두는 데 사용했던 신뢰할 만한 방법, 곧 자연과학 그 자체를 통해 이러한 보편적인 명제들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48쪽)
계몽주의는 한마디로, 인간 이성의 합리성에 대한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보편적인 이론을 만들어서 그것을 전세계 누구에게나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헤겔의 용어를 빌리자면, 계몽주의는 ‘추상적 보편성’의 단계라고 할 수 있다.
48쪽에 “18세기 초의 지배적인 미학 이론”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이사야 벌린은 계몽주의가 과학이나 윤리학뿐만 아니라 심지어 미학 이론에까지 파고들었다고 말한다. 18세기 초의 계몽주의의 영향력이 굉장히 대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 소개하는 책은 이론과실천 출판사에서 나온 비어슬리의『미학사』이다. 이론과실천 출판사가 좋은 것이, 글자를 최대한 작게 해서 많은 분량을 집어넣는다. 목차를 보면 1장 최초의 사상들, 2장 플라톤, 3장 아리스토텔레스, 4장 후기 고전 철학자들, 5장 중세, 6장 르네상스, 그리고 7장과 8장이 계몽주의다. 이 목차를 보면 비어슬리가 독특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계몽주의에 무려 두 챕터를 할애하고 있다. 따라서 계몽주의 미학이 궁금하다면, 이 책이 좋은 참고서적이 된다.
“18세기 초의 지배적인 미학 이론은, 인간은 자연을 비추는 거울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48쪽)
이것이 계몽주의 미학의 기본적인 명제이다.
“영국을 대표하는 인물임에 틀림없는 조슈아 레이놀즈는, 화가는 자연 그 자체로 자연을 바로잡으며, 더 완전한 자연으로 자연의 불완전한 상태를 바로잡고, 형상의 추상적인 관념을 현실에 있는 어떤 원본보다 완전한 것으로 인식한다고 말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이상적인 미의 이론으로, 그에 따르면 페이디아스가 불멸의 명성을 얻은 이유도 바로 이것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이상이 어디에 기반을 두고 있는지를 알아야만 한다.”(50쪽)
조슈아 레이놀즈는 가장 뛰어난 계몽주의 미학 이론가라 할 수 있다. 한 사람 더 거론하자면, 모든 예술서에서 거론되는 요한 요하임 빙켈만이 있다. 51쪽에 나온다.
빙켈만은 고대 그리스 미술에 대해 ‘고귀한 단순성’, ‘조용한 위대함’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고대 그리스에서 예술 작품을 만든 석공들이 ‘고귀한 단순성’을 형상화하려고 했겠는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art가 예술이 아니라 단순히 기술이었다. 그랬을 뿐인데 빙켈만이 새삼스럽게 고전주의에 관한 이론을 만들어낸 이유는 무엇일까? 빙켈만이 계몽주의 시대에 바탕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계몽주의 시대의 일반적인 관념들이었고, 예술의 경우에 있어서도 그들이 형식과 고상함, 비례, 조화, 분별을 강조했음은 자명하다. 물론 예외도 있었다.”(53쪽)
“물론 예외도 있었다”고 했는데 예외가 중요하다는 걸까 안 중요하다는 걸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곧 발잘적이거나 황홀경에 빠지는 성향의 사람들이 있었다. 보브나르그처럼 끔찍한 삶의 공허를 호소한 이들도 있었다. 포플리니에르 부인은 삶이 아무런 의미도, 아무런 목적도 없다고 느껴 창밖으로 몸을 던져 버리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이들은 상대적으로 소수였다.”(54쪽)
지금까지 말한 것을 정리하자면, 계몽주의는 서구 사상 전통의 세 가지 기둥에 근거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합리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설정하고 대답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합리성이란 연역과 귀납을 모두 포함하는, 이성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이다. 계몽주의자들은 이 합리성을 극단까지 밀고 나간 까닭에, 윤리학이나 정치학, 심지어 미학에까지 보편적 합리성을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계몽주의의 문제 설정 방식, 탐구 영역, 적용 영역을 논의하면 계몽주의의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의 윤곽이 잡힌다. 아까 말했듯이 긍정적 측면은 계시, 전통, 권위, 도그마 같은 것들이 무너진다는 것이다. 특히 한국에서는 계몽주의가 필요하다. 나이에 근거한 권위, 이거 없애야 한다. 부정적 측면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에서 주장하듯이, 계몽주의가 인간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도구적 이성으로 빠져들었다는 것이다.
“이 시대의 지배적인 태도는, 인간은 진보하며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있고, 낡은 편견과 우상, 무지와 잔인함을 떨치고 인류를 행복하고 자유롭게, 고결하고 바르게 만들어 줄 어떤 학문을 세우는 과정에 있다는 것이었다. 다음에 언급할 사람들이 공격한 것은 바로 이러한 태도였다”(54쪽)
계몽주의를 최종적으로 정리하고 있는 부분이다. 이제부터는 계몽주의의 균열이 언급되기 시작한다.
“다소 자기 도취적인 이 그럴듯한 이론은”(54쪽)
멋진 문장이다. 이 문장은 이사야 벌린이 하는 말이다. 계몽주의에 대한 벌린의 평가가 살짝 드러난 부분이다. 글은 이런 식으로 써야 한다.
“계몽주의 시대의 매우 전형적인 인물인 몽테스키외는 인간은 어디서나 동일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는데, 이미 많은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들이 말했지만 그동안 잊혀져 있었던 이 명제는 비록 아주 깊숙이는 아니라 해도 전체적인 그림에 흠집 같은 것을 냈다.”(54쪽)
소피스트들의 명제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를 말한다. 몽테스키외의『페르시아인의 편지』는 계몽주의 사조에 미세한 균열을 냈다.
“몽테스키외의 어떤 발언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는 몬테수마Montexuma(아스텍 제국의 제9대 황제-옮긴이)가 코르테스에게, 스페인 사람들에게는 기독교라는 종교가 유익할지 모르지만, 자기 백성들에게는 아스텍의 종교가 가장 유익하다고 한 말이 틀리지 않다고 말했다. 말할 것도 없이 이 발언은 양쪽 진영에게 모두 충격을 주었는데, 로마가톨릭 교회와 당시 프랑스의 좌파가 그들이었다.”(56쪽)
“그러므로 우리 눈에 참으로 보이지 않는 명제들이 다른 문화에서는 참일 수도 있다는 관념, 종교적 진리의 가치를 어떤 객관적 기준을 만족시키느냐에 의해서가 아니라 더 융통성 있고 실용적인 방법을 통해, 즉 그것을 믿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느냐, 그들의 삶의 방식에 적합하느냐, 그들로 하여금 어떤 높은 목표를 지향하게 하느냐, 그들의 삶과 경험의 일반적인 구조에 잘 들어맞느냐를 물어 따져 보아야만 한다는 관념은 로마가톨릭 교회와 무신론적인 유물론자들 모두에게 배신처럼 보였다.”(56쪽)
“어떤 객관적 기준을 만족시키느냐에 의해서가 아니라”라고 했다. 계몽주의는 이성을 올바로 사용한다는 객관적 기준을 추구한다. 따라서 몽테스키외는 문제 설정 방식과 대답하는 방식이 계몽주의와 다르다. 몽테스키외의 설정 방식은, “융통성있고 실용적인 방법”, “행복해게 해 주느냐”, “삶의 방식에 적합하느냐” 등이다. 그래서,
“이제 사람들은 영원불변하거나 어디든 적용되는 것이 있다고 말하는 대신, 시간적 배경과 공간적 배경이 적당히 들어맞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대부분의 장소에서 적용되는 것이 있다고 말해야 했다.”(56-7쪽)
“더 깊은 틈새는 흄에 의해 벌어졌다”(57쪽)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흄은, 자연과학의 바탕이 되는 원인과 결과의 필연적 관계, 즉 인과율이 필연성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개연성에 근거하고 있다고 말한 사람이다. 계몽주의를 뒷받침하는 핵심적인 기반은 자연과학이다. 그런데 자연과학을 뒷받침하는 핵심적인 원리는 인과율이다. 벌린은 흄이 자신이 계몽주의를 공격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을 거라 말하지만, 흄은 계몽주의의 가장 밑바탕에 놓여 있는 핵심 원리를 공격했다. 이것이 데이비드 흄의 업적이다.
몽테스키외는 프랑스 사람이고, 데이비드 흄은 스코틀랜드 사람이다. 당시에 프랑스와 영국 사람들은 더 이상 나아가진 않았다. 그들은 계몽주의에 근거한 사회적 현실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었고, 또한 그 사회적 현실의 주역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계몽주의를 심하게 비판하면 그것이 결국 자기 무덤을 파는 짓이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16세기 이래로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부르주아적 지식인들이 점차 세력을 넓혀왔는데, 그렇게 하는 데 핵심적으로 기여한 것이 계몽주의다. 따라서 계몽주의를 엎어버리면 자기를 무너뜨리는 것이 되었다. 이것이 영국과 프랑스에서 극단적인 반계몽주의가 등장하지 않게 된 핵심적인 배경이다. 그런데 독일은 그렇지 않았다.
“17세기와 18세기의 독일에 대해 사실대로 말하자면, 독일은 어쨌든 뒤떨어진 촌구석이었다. 독일인들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그것은 사실이었다. 16세기의 독일인들은 어느 누구 못지않게 진보적이고 역동적이었으며, 유럽 문화의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60쪽)
16세기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17, 18세기에는 촌구석이 된 이유가 뭘까? 핵심적인 이유는 61쪽에 나와 있는 “30년전쟁이라는 극심한 혼란” 때문이다. 독일 낭만주의를 이해할 때 반드시 거론해야 하고 항상 잊어서는 안 되는 사태가 바로 30년전쟁이다.
“무엇보다 30년 전쟁이라는 극심한 혼란을 겪는 와중에 루이 14세를 비롯한 다른 왕의 군대가 독일 인구의 상당수를 살육하고 파괴했으며, 그 피바다 속에서 문화적 진보를 이루었어야 할 것들이 궤멸되었다.”(61쪽)
독일 인구의 상당수를 살육하고 파괴한 대표 주자가 누구인가? 루이 14세. 어느 나라 사람인가? 프랑스 사람. 이제 독일인들은 프랑스 하면 짜증나는 거다. 벌린은 독일인들이 프랑스에 대해 안 좋은 감정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면서 64쪽에서 ‘여우와 신 포도’ 우화를 거론한다. 여우는 독일인들이고, 신 포도는 프랑스인들이다. 벌린은, 독일인들이 프랑스를 보면서 무척 질투가 났는데, 프랑스를 따라갈 수 없으니 프랑스는 안 좋은 것이라고 여기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독일은 30년전쟁으로 인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중앙집권적 국가를 수립하지 못하는 후진국가가 되어버렸다. 지난 번에 말했던『문학과 예술의 사회사』3권을 보자.
“18세기의 낭만주의 운동은 유럽 어디에서나 사회학적으로 모순이 많은 하나의 현상이었다. 낭만주의 운동은 한편으로는 계몽주의와 함께 시작된 시민계급 해방의 연장 내지 그 상승으로서 평민층의 과다한 감정과 정열을 표현함으로써 상류층의 까다롭고 자제된 주지주의에 대립되는 운동이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상류층 스스로가 계몽주의의 ‘파괴적인’ 합리주의와 개혁주의에 반대한 운동이기도 했다.”(135쪽)
프랑스와 영국의 낭만주의는 이러했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이 합리주의는 한번도 사회생활 속에, 즉 광범한 사회계층의 정치적.사회적 사고및 시민계급의 생활태도에 완전히 침투한 적이 없었다.”(136쪽)
독일에도 칸트처럼 합리주의 철학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독일인들이 죄다『순수이성비판』을 읽은 것은 아니었다. 칸트의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을 읽은 사람도 드물었다. 위 문장이 바로 당시 독일 계몽주의의 현주소였다. 아르놀트 하우저가 독일 계몽주의를 상당히 갈구고 있다. 137쪽 맨 위에 “지식인의 정치적 천진성과 무지”라는 표현이 있다. 남의 나라 얘기 같지 않다. 학자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거의 모든 이들이 학술진흥재단의 프로젝트를 받아서 한다. 그렇지 못한 교수는 제자가 없다. 이공계에서는 BK21을 수주하지 못하면 폐허가 된다. 돈이 없어서 실험을 할 수가 없다. 그나마 철학과에서는 책만 있으면 되지만, 이공계는 어쩌겠는가? 한국 지식인들도 정치적으로 천진하고 무지하다. 사회에 끼치는 영향이 5급 공무원들만 못하다.
하우저는, 독일에서 계몽주의가 발달하지 않은 이유, 그리고 느닷없이 정신적인 심오함으로 파고드는 낭만주의의 전조라 할 수 있는 경건주의가 등장한 이유를 알려면 “그 이전에 왜 독일 지식인이 낙후되었는가 하는 문제 자체가 먼저 해명되어야 한다”(137쪽)고 말한다. 그 이유를 하우저는 독일 지식인들이 “경제적.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함으로써 이와 함께 그들의 문화적 중요성도 상실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책 제목이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아닌가?
“30년 전쟁(1618~48)은 독일 무역을 완전히 붕괴시켰고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독일 도시들을 깡그리 파괴하였다. 베스트팔렌 평화조약은 독일의 소국(小國)분립주의를 확정시키고 지방영주들의 독립권을 확인하였다.”(138쪽)
이러면서 독일 지식인들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것이 당시 독일의 사회경제적 상황이며, 독일에서 계몽주의가 발달하지 않은 중요한 이유이다.
“지식인층은 사생활과 정치 사이에 하나의 경계선을 긋고, 공적인 문제들에 대한 일체의 실천적 영향력을 처음부터 포기하는 데에 길들여져 있었다. 그들은 이상주의를 극단화하고 자신들의 이념이 세속적 이해와는 무관하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이를 보상하였고 국정에 관한 모든 일을 전적으로 권력자에게 위임하였다.”(142쪽)
재미있는 점은, 이렇게 독일 지식인들이 현실적으로는 세속적인 일에 거의 관여하지 못했는데도, 인류 보편의 문제를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당시 유럽에서 아무런 역할도 못하던 독일인들이 세계사의 발전과정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하게 보편적인 문제이다. ‘세계문학’이라는 말을 처음 내놓은 사람도 독일인인 괴테였다. 당시 괴테는 궁정 문필가일 뿐이었다.
“그들의 사고는 순전히 정관적.사변적.비현실적.비합리적으로 되었고, 그들의 표현 방식 또한 고집스럽고 극단적이며 난해하게 되었으며 남을 고려해서 글쓸 능력이없게 되었을 뿐 아니라 남으로부터 교정이나 비판을 받는다는 것을 일체 싫어하였다.”(142-143쪽)
“고집스럽고 극단적이며 난해”, 이거 정말 징그럽다. 헤겔의『정신현상학』을 보면, 시체라고 하면 될 것을 ‘존재의 비생동적 상태’ 이런 식으로 말한다. 그리고 “남을 고려해서 글쓸 능력이 없게” 되었다. 왜? 남에게 읽힐 일이 없으니까. 그나마 칸트는 깔끔하게 썼지만, 피히테, 쉘링, 헤겔에 가면 머리 뽀개진다. 심지어 나중에 철학과 올 사람들을 애먹이려고 작당하고 그렇게 쓴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다시『낭만주의의 뿌리』로 넘어와서 62쪽을 보라. 프랑스는 화려한 나라였다. 독일도 궁정들은 화려했다. 그러나 지식인들의 삶은 궁정에서의 삶과는 완전히 달랐다. 이제 ‘신 포도’가 등장하는 것이다.
“이런 배경에 대항하여 낭만주의의 진정한 뿌리인 경겅주의 운동이 독일 사회 내부에 깊이 자리잡았다. 경건주의는 루터주의의 한 분파로, 성서를 면밀히 연구하였으며 인간과 하느님이 맺는 인격적 관계를 매우 중시했다. 그 결과 자연히 영적 생활을 강조하고, 지식을 경시하며, 의례와 형식, 겉치레와 의식을 멀리하게 되었고, 고통받는 인간 개개인의 영혼이 그의 조물주와 맺는 직접적인 관계에 중점을 두었다.”(62쪽)
얼핏 보면 좋지만, 이게 잘못 풀리면 파시스트가 된다. 경건하다는 것은 깔끔하다는것이다. 깔끔한 걸 좋아하는 애들이 그렇지 않은 걸 가만두지 않는다. 완전히 밀어버린다. 조금 지저분한 걸 용서할 수 있어야 하는데, 청소해버린다.
위 문장들에 나와 있는 모든 얘기들이 서두에 말했던 계몽주의와 대척점에 서 있는 것들이다. 여기서 벌린이 “낭만주의의 진정한 뿌리”라고 한 것을 유념해둘 필요가 있다. 이런 경건주의에 필이 꽂혀 있는 사람이 게오르크 하만이다. 아까 하우저 책에서 경멸당했던 애들이 66쪽에서 거론된다.
“레싱, 칸트, 헤르더, 피히테는 모두 아주 보잘것없는 집안 출신이었다. 헤겔, 셸링,실러, 휠더린은 중하류층 출신이었다. 괴테는 부유한 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자신에게 맞는 지위를 얻게 된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었다. 오직 클라이스트와 노발리스만이 당시의 지방 신사 계급이라 불릴 만한 정도였다. 어느 정도 귀족과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 독일 문학, 독일인들의 생활, 독일의 미술, 그 외 어떤 분야든 독일 문명에 일익을 담당했다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들은, 내가 찾아본 바로는 백작 가문의 크리스티안과 프리드리히 레오폴트 슈톨베르크 형제, 신비로운 인물이었던 카를 폰 에케르트샤우젠 남작 - 엄밀히 말해 최상류층이거나 높은 지위의 인물들은 아니었지만 - 뿐이었다.”(66쪽)
“한편 당대의 프랑스인들, 모든 급진주의자들과 좌파, 전통과 교회, 군주 정치, 현상태에 대한 가장 극단적인 반대 세력이었던 이들을 생각해 보면, 이들은 모두 실로 매우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몽테스키외는 남작이었고, 콩도르세는 후작이었으며, 마블리는 성직자, 콩디야크도 성직자였고, 뷔퐁은 훗날 백작이 되었으며, 볼네는 명문가 출신이었다. 달랑베르는 귀족의 사생아였다. 엘베티우스는 귀족은 아니었지만, 그의 아버지는 왕비를 진찰하던 시의侍醫였으며, 그 자신은 백만장자이자 징세권 보유자였고, 나중에는 궁정에까지 진출했다.”(62쪽)
그러니까 프랑스의 계몽주의자들은 잘 나가는 애들이었던 데 반해 레싱, 칸트, 헤르더, 피히테, 헤겔, 셀링, 실러 등 우리가 알 만한 독일 지식인들은 못살던 애들이었다. 못살았다는 게 중요하진 않다. 벌린은 그들이 정치적으로 사회의 의제를 세울 수 없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헤르더이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독일인들에게 거슬렸고 굴욕과 좌절을 느끼게 했다. 헤르더가 1770년대 초반에 파리를 방문했을 때, 그는 이들 중 어느 누구와도 사귈 수 없었다.” (67쪽)
서로 대화 안 되는 것이다. 벌린이 너무 심리적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느냐고 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는 않다. 하우저의 책을 교차 체크해보면 확인이 된다.
“계몽주의에 가장 치명적인 일격을 가했으며, 낭만주의의 모든 과정, 즉 지금까지 내가 기술하고자 했던 관점들에 대한 반역의 모든 과정을 촉발시킨 한 사람이 있다. 그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으나, 때로는 무명의 인물들이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는 법이다 (히틀러 역시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는 무명이었다).”(68쪽)
벌린이 히틀러가 갑자기 생각나서 여기에 넣은 것은 아닐 것이다. 나치즘과 낭만주의를 엮고자 하는 시도가 엿보인다.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무명이었던 인물이 히틀러 한 명뿐이겠는가?
“요한 게오르크 하만은 매우 보잘것없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쾨니히스베르크의 목욕탕 주인이었으며, 어린 하만은 동프로이센의 경건주의 운동의 분위기 속에서 자라났다.”(68쪽)
하만 역시 헤르더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의 생각이 어떠했는지 알아보자.
“프랑스인들은 학문의 일반 원칙들을 다루었지만, 이러한 일반 원칙들은 현실의 삶, 고동치는 삶의 실재성을 결코 붙잡지 못했다. 한 남자를 만나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자 할 때, 몽테스키외나 콩디야크의 저서에서 주워 들은 다양한 심리학적.사회학적 일반론으로 성급히 정의해 버리는 것으로는, 그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의 본질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서로 교제하는 방법 뿐이다. 교제는 두 인간 존재가 실제로 만나는 것을 의미하며, 상대방의 얼굴을 관찰하고, 몸을 어떻게 비트는지, 또 몸짓은 어떠한지를 관찰하고, 그가 하는 말을 듣고, 나중에 분석해낼 수 없는 다른 많은 방식들로 주어진 자료에 확신을 얻어, 자신이 지금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70쪽)
계몽주의자는 보편 이론에 대해 말하지만, 하만은 어떤 사람과 교제하려면 일대일로 만나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태도는 보편 이론과 추상성에 대한 부정이다.
“여기서 하만은 이른바 베르그송식의 결론을 이끌어 내는데, 곧 생명은 유출되며, 그 흐름을 잘라 구분하려는 시도는 그 맥을 끊어 버린다는 것이다.”(71쪽)
잘라 구분한다는 것은 분석한다는 것인데, 그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만은 두 가지 점에서 계몽주의를 비판했다. 우선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원리들을 부인했고, 삶의 약동하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수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생의 약동, 유출, 개별성, 창조를 향한 욕망, 하만과 그의 추종자들에 의하면 프랑스인들이 추구하는 무기력한 조화와 평화 대신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 창조적인 의견 충돌을 일으키는 인간 본성의 투쟁에 대한 욕망조차 무시하는 프랑스의 경향에 반대했다. 하만은 이렇게 새로운 장을 열었다. 그의 접근 방법을 보여주는 단적인 구절을 인용해 보겠다. 하만은 인간 영혼의 지복至福은 볼테르가 생각한 것, 즉 행복이 결코 아니라고 말한다. 인간 영혼의 지복은 그가 가진 힘의 자유로운 실현에 기반을 두고 있다.”(73쪽)
““도대체 모든 사람이 숭배하는 이성이란 무엇이며, 그것이 가졌다고 일컬어지는 보편성과 무오류성, 거만함과 확실함, 자명함은 또 무엇인가? 그것은 울부짖는 어리석음이라는 미신이 신성한 속성을 부여한 인형에 불과하다.””(74쪽)
다음은 내가 꼽은 2장의 문장이다.
“인간은 점차 자신의 주위를 단단한 벽으로 둘러싸 연약한 표면을 드러내지 않으려한다 - 최대한 상처를 덜 받고 싶은 것이다. 갖은 상처들이 그 위에 겹겹이 쌓여 왔으므로, 그는 최소의 공간에 자신을 제한시켜 더는 상처에 노출되지 않기를 바란다.”(64-65쪽)
독일 경건주의가 일어나던 시대의 분위기를 설명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벌린이 이렇게 말하면 굉장히 흡수력이 강하다. 정말 짠해 보이지 않는가? 상처 덜 받고 싶어하는 모습이 확 와 닿는다. 내용을 얼마나 잘 담고 있는가보다는 단순히 레토릭의 효과로서는 이 부분이 뛰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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