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철학사 | 37 계몽철학의 완성자로서의 Kant, 구성설적 인식이론
- 강의노트/라디오인문학外 2013
- 2013. 3. 25.
세상의 모든 철학 - 로버트 솔로몬 외 지음, 박창호 옮김/이론과실천 |
2012.11 강의
37강: 계몽철학의 완성자로서의 Kant, 구성설적 인식이론
38강: Kant의 실천철학, 목적론과 사변철학으로의 端初
39강: Hegel 철학의 형성과정, Hegel의 Front, 철학의 목표로서의 ‘삶의 통일(Einheit des Lebens)’
40강: Hegel의 형이상학: 유한자와 무한자의 통일, 무한자의 입장으로 올라섬; 철학사 공부 이후의 공부, 선생에게 이쁨받는 학생되는 법
20121109 37강: 계몽철학의 완성자로서의 Kant, 구성설적 인식이론
현대 사회에 철학적으로 직면하고 있는 여러 문제들, 그런 것들의 문제 설정에 대한 기본적인 구도가 칸트에게 있으니까 칸트를 잘 읽는 것이 중요하다. 칸트 이후에 어떻게 전개 되는가는 현대 철학에서 배우는 것이지만 근대철학의 완성자로서의 칸트에게서 고대철학으로부터 지금까지 쭉 제기되어왔던 여러가지 문제들이 칸트에서 다시금 재설정되고 또 뉴턴이나 루소나 스피노자의 문제들, 또 우리가 현재 현대사회에서 가장 심각하게 직면한 문제인 과학 기술의 문제에 대해 어떻게 세팅이 되어왔는지를 보자.* 우선, 칸트가 처했던 지성사적 배경을 살펴보자.
<교재>
362 독일인들은 계몽사상을 약간의 의혹을 가지고서 환영하였으며, 프랑스 혁명을 (안전한 거리를 두고서) 공포심을 가지고 보았다.
>> 프랑스 혁명이라고 하는 것이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에 하나인데 홉스봄의 표현을 빌리면 이중혁명, 프랑스혁명과 산업혁명, 독일에게는 직접적인 영향은 없었다.
362 독일에서는 과학과 보편적 합리성으로부터 태어난 새로운 이상들이 일반적으로 부차적인 역할밖에는 수행하지 못했다.
>> 독일 계몽주의 철학의 완성자로의 칸트라고 하는 지점부터 칸트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다.
독일 상황 일반에서는 계몽주의가 부차적인 역할 밖에 수행하지 못했다.
362 그렇지만 최고의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독일인이었다.
>> "철학자들은"라는 말이 포인트. 실천가들이 아닌 철학자. 즉 현실의 실천적 또는 정치적으로 뒤질수있지만 현실화되지 못한 상태에서의 계몽주의가 있었다는 것.
이것을 나중에 막스베버는 이렇게 말한다. "독일에서는 계몽이라고 하는 것이 시민의 차원으로 완전히 스며들지 못했기 때문에 교육이 되지 않았고, 그것이 바로 시민 계급의 부재가 되면서 쉽사리 전체주의로 쓸려들어갈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막스 베버는 나치즘의 성황을 보지 못했으나 시민계급의 부재라고 하는 것, 독일사람들이 가지고 있지 못했던 개인 의식, 개인의 자각 그게 없었다는 것, 막스 베버가 가지고 있었던 가장 심각한 우려였다. 그래서 베버의 사회학이 개인중심으로 가는 것. 한국 사람들도 그 것이 없다.
베버의 사회학은 그 자체로는 굉장히 탁월하나 한국사회에서 읽을만 한것인가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달리 생각해봐야한다. 베버의 시대와 지금의 시대, 사회의 위력이 다르다.
칸트를 어느 만큼 읽어서 어느 만큼 옹호할 것인가, 베버를 어느 만큼 읽어서 어느 만큼 옹호할 것인가, 이것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어떤 것을 요구하는 냐에 달려있다.
일본의 정치학계의 거장인 마루야마 마사오가 쓴 책들을 보면 아주 자유자재로 일본 정통의 학문들이 서양 학문들과 교차되고 비교되고 논의된다. 그정도로 공부를 해야한다.
362 최고의 독일 계몽주의 철학자는 임마누엘 칸트(1724~1804)로서, 그는 라이프니츠의 제자의 제자이자 동시에 뉴턴의 물리학과 사회와 교육에 관한 루소의 급진적인 새 이론에 대한 열광적인 추종자였다.
>> 자연과학에 경도된 과학자로서의 칸트. 그리고 사회와 교육에 관한 루소의 급진적인 이론 = 자유의지에 관한 논의, 소유권의 기반에서 일반의지에 기반한 사회로의 전환에 대한 열괄적인 추종자
362 데이비드 흄의 회의론을 만나면서 시작된 또다른 혁명이었다. 흄의 회의론은 칸트를 '독단의 잠', 즉 라이프니츠 형이상학의 무비판적 수용에서 깨어나게 했다.
>> 칸트의 인식이론의 출발점이 된다.
칸트는 독일 계몽주의의 완성자.
칸트가 말하는 계몽주의가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이해할 때 칸트 철학의 전 면모를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다.
그래서 칸트에게 있어서 '계몽이란 무엇인가'를 먼저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칸트 '인식이론'을 이야기한다.
다음주에 칸트에 있어서 실천철학, 즉 절대적 자발성으로서의 자유의지로 시작해서 그런 자유의지에 근거한 공동체, 즉 칸트의 사회철학, 윤리학, 역사철학, 그리고 칸트 철학이 어떻게 해서 루소 철학의 영감을 얻었는가, 루소가 어떤 지점에서 바로 근대철학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 설정 구도를 만들어 내었는가를 2가지 측면에서 정리할 예정.
* 칸트 1724-1804
31세 박사 / 46세 교수
57세 1781 <순수이성비판> 출간
63세 1790 <판단력비판>
* 칸트에게 있어서 계몽이란 무엇인가
1784년에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 에세이를 기고했다.
칸트철학의 출발점이자 동시에 기본적인 입장을 전부 다 담고 있다
여기에서 칸트는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내왔다.
1) 미성숙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 즉 어른이 된다는 것.
2) 항상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는 것
3) 편견과 미신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에서 "보편적 인간 이성 개념"을 제출한다.
- 보편적 인간 이성 universalis hominum ratio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국민들의 합의에 따라 의사결정을 한다는 것. 각각의 주권자가 다 평등.
다시말해 모든 사람이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깔려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는 것.
주권재민, 주권 평등이라는 정치적 원리의 밑바닥에는 모든 사람이 이성을 가지고 있다는 철학적 원리가 있다.
칸트가 말하는 보편적 인간 이성이라는 개념은 그냥 철학적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이 말 하나가 근대의 개인이 가지고 있는 진리 담지체로서의 개인, 그리고 그들이 정치적으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을 다 담고 있다.
1784년에 독일 프로이센을 염두해 두고 생각해보면 대단히 혁명적인 발상이다.
① 보편적 이성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
② 인간 이성
인간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인간은 유한한 존재. 인간이 가진 이성이다.
즉 오류가능성을 가진 이성이다.
실수하고 잘못할 수 있는 유한자의 이성 / 편견과 오류가능성을 지닌 이성 / 이해관계에 따라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이성
누구나 다 가지고 있으나 완전하고 절대적인 신적인 이성은 아니다라는 것이 보편적 인간 이성이라는 칸트의 개념이 제시하고 있는 말. 오류와 편견을 벗어나는 것, 보편적 인간이성을 제시해놓고, 인간 이성의 특징인 편견과 오류에 빠질 수 있는 것을 극복해 나가는 것, 이것을 계몽해 나가면 보편적 인간 이성도 오류,편견을 벗어난 진정한 의미에서의 보편적 이성으로 접근해 갈 수 있다는 것이 칸트 철학.
자신과 남의 오류가능성과 옳을 가능성을 똑같이 생각하고, 이것을 알고 이것을 모른다고 인정하는 완전하지는 않지만 완전에 가까워 질 수 있는 것, 이 것이 곧 민주주의의 바탕이 되는 것이다.
칸트야 말로 정치학적인 의미에서 민주주의의 밑바탕에 놓이는 철학적 입장을 내놓은 사람이다.
이에 반대되는 것이 나는 옳은데 너는 틀렸어라고 말하는 것 = 당파성.
당파성을 가진자는 절대적 진리를 자기가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헤겔, 마르크스가 당파성의 철학이고 칸트는 민주주의의 철학이다. 마르크스, 당파성은 칸트의 계몽철학의 입장에 딱 반대에 맞서 서 있는 것
보편적 인간이성이라는 개념이 칸트에게서 제시되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보편적이지만 인간이라고 하는 유한한 존재, 즉 오류와 편견의 가능성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존재가 가지고 있는 점에서 인간 이성.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다 틀렸다는 의미는 아니다 = 총체적 오류불가능성.
여기서 칸트는 보편적인간이성을 놓고, 이 지점에서 이성이라고 하는 것이 이처럼 인간의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아주 높은 인간의 이성임을 인정하고 그것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고려하는 것, 이 태도가 칸트 이후의 모든 철학을 규정해 나가는 밑바침.
칸트 철학을 읽을 때는 '아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부분적 진리 밖에 가질 수 없음을 뼈져리게 승인하고 가는 사람이구나, 그 선을 절대로 넘어가지 않는 사람이구나'를 생각해야 한다.
스피노자도 인간이 유한자라는 것을 인정하지만 신의 변형태라고 말해버리면 겸손한것 같지만 되게 오만한 것.
부정적인 의미에서 스피노자주의는 인격신을 부정했다는 점에서는 무신론에 가깝지만 그렇다해도 유한자와 무한자 사이에 있는 단절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굉장히 칸트와는 다르다. 그래서 헤겔이나 쉘링이나 이런 사람들을 스피노자주의라고 할 때는 이 사람들이 무신론자라고 비난하는 의미도 있지만 유한자의 입장을 넘어서 무한자로 넘어서려는 태도를 가진자라고 할 수 있다.
칸트는 유한자의 제약성을 인정하면서도 가능하면 어떻게하면 그것에 벗어날 수 있을까를 모색한다. 이게 칸트 철학의 전부.
아주 간단한 방법이 하나 있는데 첫째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 보는 것,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 봄으로써 인식의 범위를 넓히는 것, 대화하고 토론하고.. 그렇게 해서 점차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오류와 편견을 제거해 나가고, 그렇게 해서 개별적으로 가지고 있는 편견과 이해관계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참다운 보편적 이성에 "접근"해갈 수 있다. 그게 바로 계몽의 과정. "접근"이라는 단어는 칸트 철학을 규정하는 중요한 술어 중에 하나. 헤겔이 '칸트는 진리에 접근할 수 있을 뿐 진리에 이르지는 못한다'라고 말을 했다.
Aufklärung(아우프클래룽) = 계몽 = 명료하게 한다.
그래도 인간은 가끔은 무한자에 대해 생각할 때가 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것, 생각은 할 수 있는데 도달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오바다. 오바 = 초월. 이성의 초월적 사용. 이성은 초월적으로 쓰면 안되고 통제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목표로 삼되 함부로 이것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하면 안된다. 칸트의 용어대로 말하자면 헤겔은 이성의 초월적 사용을 주장한 사람.
칸트의 철학은 우리 인간은 유한자니까 유한한 이성의 철학이고, 온전한 총체적 진리는 인간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앞에 주어진 과정일 뿐이다라고 인정을 하며 철학은 무한자를 관망할 수 있을 뿐 가질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칸트철학의 기본적인 태도.
<세계시민적 관점에서 본 보편사의 이념>
이 '세계시민적 관점에서'라는 것까지는 가보는 것. 다시말해서 전 시민의 입장에서 올라서는 것.
그러면 왜 이게 필요한가? 우리가 적어도 살고 있는 공동체에서 우리의 인식을 공동체의 성원들 전체에 올라서려면 그들이 합의하고 있는 보편성이라는 것이 하나는 있으리라고 상정할 수 있다.
그 지점은 현실적으로 인식의 범위를 넓힌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이념을 상정해야하는 때가 있다.
각각의 다양한 진리를 다 인정하다 보면 결국 올바름에 이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세계 시민적 관점이라는 것을 말해 버리면 '보편을 생각해서 정한다', 즉 보편을 상정한다고 하는 것은 이것은 나의 오류를 인정하고 너의 오류를 인정하고 나의 올바름을 인정하고 너의 올바름을 인정하는.. 하나하나 쌓아 올라가는 계몽의 과정이 아니다.
보편적 올바름을 직관하는 것은 계몽을 부정하는 것이다. 칸트는 <세계시민적 관점에서 본 보편사의 이념>을 본격적인 논문으로 쓰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계몽철학이 무너진다. 따라서 칸트는 이것을 상정하라고 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칸트의 적극적인 주장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 kritik
이렇게 함으로써 칸트철학에 대한 준비가 되었다.
계몽주의 입장에서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가 나오게 된다.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의 견해에 대해서 신중하고 관대하게 대하고, 반대되는 입장에서도 그것이 진리의 조각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는,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고 다른사람에게 솔직하게 밝히고.. 이러한 태도들을 계몽의 철학에서 이야기한다. 그렇게 해서 지금 이 설명한 모든 태도를 묶어서 kritik 크리틱이라고 말한다.
칸트의 철학은 크리틱의 철학이다. 한계를 명료하게 한다는 뜻. 너는 여기까지, 이성은 여기까지, 이렇게 경계선을 분명하게 긋는다. 그러니까 kritik이라 하는 말은 1차적인 의미에서는 비판한다는 뜻이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나는 그것을 잘 모릅니다, 제가 아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라는 겸손함의 태도도 있다. 칸트의 비판철학, 즉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에서 비판이라는 단어가 바로 kritik. 사실 비판이라는 단어는 적당한 번역이 아니다.
한계 짓기, 한계 설정, 순수이성비판 = 순수이성의 한계를 논하기, 실천이성비판 = 순수 이성의 한계 설정, 판단력비판 = 판단력의 한계 설정, kritik이란느 단어를 칸트의 경우에서는 한계를 설정한다, 초월적으로 사용하지 않겠다는 것.
Aufklärung과 긴밀하게 붙어있다.
비판을 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굉장히 겸손한 철학이고 유한자의 입장에 충실한 철학.
칸트가 쓴 저작 중에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가 있는데 제목을 보면 종교인데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 굉장히 겸손한 표현이다.
칸트의 입장에 서는 것이야말로 근대철학에 다다를 수 있는 가장 최선의·최적의 입장.
그런데 칸트 이후의 철학자들은 자기가 이성을 초월적으로 사용해서 무한자를 알 수 있다고 하고 올라갈 수있다고 한다. 당파성이 들어가는 것. 나는 진리, 너는 비진리. 이렇게 진리에 담지자임을 천명하고 타자를 전멸시키려는 것이 당파성의 입장.
칸트는 인간이 총체적으로 완전히 잘못을 저지를 가능성은 없다고 말하지만 동시에 총체적으로 알 수 있을 가능성도 부정한다. 부분적인 진리 인정. 밑바닥에 놓여있는 것부터 시작해서 전체를 다 꿔는것이 system 체계. kritik의 반대말이 system이다.
헤겔 철학은 한마디로 system , 칸트철학은 kritik의 철학이다라는말이 여기서 나온다.
* 칼 포퍼 <열린사회와 그적들>
헤겔의 텍스트에 대한 정확한 독해에 근거해서 하는 말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 비판이 가지고 있는 신뢰성의 문제가 상당부분 제기되어서 오늘날에는 그 텍스트에 대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일정 부분 수긍할만한 내용을 담고 있는 텍스트가 바로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적들>이다. 포퍼가 열린사회의 적들로 지목한 사람이 바로 플라톤, 헤겔, 마르크스. 포퍼야말고 칸트적인 kritik의 입장에 서 있는 사람. 포퍼의 입장에 서 있는 사람을 포러리안이라고 부르는데 포퍼는 우리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완전한 진리를 알 수 없고 무한자에 올라갈수없다, 그냥 시행착오를 겪어서 하나하나 날마다 깨우치면서 올라가는 비판적인 합리주의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이 태도가 바로 칸트에서 나오는 것.
- historicism
포퍼는 플라톤, 헤겔, 마르크스 이런 사람은 인간이 전체의 진리를 알 수 있다고 상정하고 또 그 전체의 진리의 담자지인냥 과신하며 인간 사회가 궁극적으로 어디로 가야할지에 대해서 그 목적지, 종착점을 인간이 알 수 있다고 상정하여 인간을 그 쪽으로 끌고 가려는 태도들이다. 즉, system의 철학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그거다라고 말한다. 그런 태도들, system의 철학으로부터 곧바로 도출되는 태도가 historicism 히스토리시즘,역사주의
역사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이 아니라 포퍼가 만들어서 가리키는 말로 자기들이 system의 철학을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이 system에 근거해서 역사의 궁극적인 목적까지도 인간이 알 수있다, 그쪽으로 가야한다고 생각하는 태도를 지스템의 철학에서 도출되는 사회적철학적인 태도를 역사주의라고 불렀다. 그래서 포퍼는 열린 그적들에서 그들을 비판하고, <역사주의의 빈곤>에서 헤겔과 같은 system주의자들을 비판한다. 그런 것을 읽을 때도 기본적으로 포퍼가 칸트가 말하는 kritik의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 칸트의 인식이론, 구성설적 인식이론
안다는 것이 도데체 무엇인가, 흔히 말하는 칸트의 인식이론
대상에 대해서 안다고 말하는 것, 대상으로부터 감각 기관이 움직이는 활동, 작용 이런 것들을 '직관'이라고 한다.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칸트의 용어로 '직관'은 가장 수준 낮은 수동적인 인식을 말한다.
독일 관념론 철학자들이 직관이라는 말을 쓰면 10개중에 9개가 이런 뜻이다. 예를 들어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을 보면 직관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것을 읽을 때 고도로 수준 높은 인식능력으로 생각하면 오역이 벌어지는 것이다. 벤야민은 독일 관념론의 맥락에 있는 사람이다.
외부로부터 무언가 오는 것을 감각기관이 받아들이는 것을 '직관'이라고 하고 직관하는 능력을 '감성'
칸트는 영국의 경험론자들이 인상이라고 한 것을 세분화해서 말하는 것.
직관하는 능력인 감성, 감각기관의 작용을 말하는 직관, 이런 직관활동을 통해서 감성이 받아들인 것 이것을 '현상'이라고 말한다. 대상이 가지고 있는 무언가가가 있고, 대상의 본질이 아닌 대상이 우리에게 준 것.
이 직관활동을 통해서 감성이 알아내서 만들어낸 것이 '현상'. 이것은 대상이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 있는데 대상의 본질이 아니라 현상의 재료가 되는 것, 이것을 칸트는 '현상의 질료(재료)' 라고 한다.
대상은 본질과 현상의 질료로 이루어 졌다. 본질은 알수없다. 여기까지는 경험론.
직관이 현상을 받아들일 때 '공간'이라는 형식과 '시간'이라는 형식, 일종의 필터가 개입된다. 이를 '직관의 형식' 다시말해서 대상이 우리 감각 기관에 준 일정한 데이터가 있는데 이 데이터를 공간과 시간이라고 하는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형식에 따라서 쭈욱 배열해서 내놓으면 '현상'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이 현상을 가지고 이게 무엇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단순 관념, 단순 관념이 섞여서 복합관념이 되는 것은 경험론. 칸트는 그렇게 말하지 않고, 이 현상이 다시 인간의 사유하는 '오성'으로 설명한다.
받아들이는 것은 수동적인데 들어와서 우리에게 남은 뭔가 주어진 데이터들을 사유가 분석하고 하는 것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하는 것. 그래서 이때 사유가 현상을 살펴보는 것, 이 사이에 끼어 들어가는 것이 오성의 형식. 이것을 '범주'(카테고리)라고 불렀다. 그렇게 해서 이건 현상인데 다시 사유에게 재료가 되었다. 현상과 사유의 활동, 이 2개가 합해져서 만들어진 것이 대상인식. 그러면 대상인식하고 원래 대상하고 똑같은가? 다르다. 우리는 여기까지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이렇게 구성된 대상에 대한 인식은 본래의 대상하고 딱 합치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것은 인간의 인식은 딱 여기까지. 한마디로 말해서 대상의 본질을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면 이 대상의 본질을 칸트는 Ding an sich 사물 자체라고 불렀고, 여기서 칸트의 인식이론의 특징인 '물 자체는 알 수 없다'는 명제가 나온다.
오늘날 뇌과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는 우뇌로 데이터를 받아서 좌뇌가 스토리를 만들다. 사후적인 이야기를 구성해서 만들다고 한다. 다만 여기서 칸트에게서 중요한 것은
1. 우리가 뭔가를 안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게 이뤄어져있는 것은 아니다. 무조건 받아들인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유가 뭔가 적극적으로 활동해서 구성해내는 측면이 있다는 점이 칸트가 해낸 아주 중요한 요소중 하나. 오성이라는 범주들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
2. 아무리 우리가 노력한다고 해도 저 바깥에 있는 대상들의 본질은 알 수없음을 인식이론으로 확증해 보인 것.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의문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공간과 시간, 오성이 가지고 있다는 범주는 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원래 가지고 있는 것. 그런데 칸트는 공간과 시간이라는 직관의 형식과 범주라고 하는 오성 형식은 도데체 어디서 왔느냐는 말하지 않고, 이것은 다만 우리가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말을 한다. 그러니까 공간과 시간이라는 직관의 형식과 범주라고 하는 오성 형식은 누구나 다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으니까 이 것만 잘 사용하면 물 자체는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공통의 인식은 만들어낼 수 있다. 즉 인식의 필연성은 우리가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필연성에 의해서 보장이 된다. 그런데 칸트에 따르면 여기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과연 공간과 시간, 범주(질,양)는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가? 논증하지 않아도 되는것인가?
칸트는 이런 시간과 공간, 범주를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데,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해서 '내재해있다'라고 한다. 이것은 경험에서 얻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라는 범주는 경험으로 얻는 것이 아니다,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경험을 초월해 있다.
즉 내재적이면서 동시에 초월적이다. 이것을 가리키기 위해서 칸트는 transzendental이라고 썼다.
다시말해서 공간과 시간, 범주 이런것들은 경험을 통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경험 초월적이다.
- transzendental
그런데 이런것들이 있어야만 외부에서 데이터가 들어왔을때 그 데이터를 규정해서 대상인식을 만들어낼 수있다.
경험을 넘어서 있으면서도 우리가 갖추고 있으면서도 경험을 넘어서 있는데 그런 것들이 있어야만 경험이 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초월론적이다. transzendental하다. 이게 칸트철학의 핵심이다.
그런데 중요한 건 과연 이것을 우리가 가지고있는가, 우리가 본래부터 가지고 있다고 상정(규정)했을 뿐이지 사실 본래부터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왜 가지고 있다고 말했을까? 인간 인식의 보편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저 끊임없이 변하는 대상들을 일관성 있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불변의 것이 어딘가에는 있어야하는데 그 불변의 것을 칸트는 인간 안에 집어넣은것.
칸트의 합리주의적 편견이다.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임을 깔고 들어가는 것. 경험세계는 항상 불확실하다. 그러니가 칸트는 경험론과 합리론을 조화시켰다 말하지만 기본적으로 합리주의자. 우리 인간은 나면서부터 대상을 이성적으로 파악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있다라는 의미에서 합리주의자.
칸트가 자기의 이론, 즉 직관의형식과 오성의형식이 가지고 있는 특성을 우리가 대상인식을 구성할 때 작동하는 이런 형식들의 특성을 밝혀보이기 위해서 인식주관에 내재해있으면서 동시에 경험을 초월해 있다고 하는 이런 형식들의 특성을 밝히기 위해 transzendental이라는 용어를 새로이 만들어 내서 써냈고, 초월론적 철학을 성립을 시켰는데 사실은 그 초월론적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느냐? 증명되지 않은 인간 인식의 주관의 합리성, 선천적 합리성에 근거를 두고있다. 그런점에서 칸트는 한계를 보이고 있다.
인간이성이라고 하는 것은 부분적인 것인데 그 앞에 보편적이다라는 말을 넣어놨다. 보편성을 확보하려고 하다보니 무언가 불변의 기준이 어디에는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사람이 가지고 있는게 편할것 같으니 그렇게 넣어놨다. 왜 인간은 저렇게 보편성을 추구해야 하는가를 말했더라면 더 설득력이 있었을 것.
왜 칸트가 이러한 구도를 설정했는가를 생각해봐한다. 즉, 최소한의 오늘날 용어로 통약가능성이라도 확보하려면 어딘가에 불변의 것을 넣어야하는데 칸트는 이것을 인식 주관에 넣었던것. 여기서 칸트의 이론이 옳다그르다를 따져묻는것이 중요한게 아니라 왜 칸트는 이런 인식이론을 내놓아야만 했던 것인가 이것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칸트는 사태를 지나치게 간단하게 봤다. 인식이라고 하는 것도 외부에게 주어지는 데이터가 우리에게 쌓이고, 그 데이터를 받아들이는 우리 인간의 능력의 상호작용으로 일어나는건데 여기에 불변의 것이 있다고 상정한 것이다.
칸트의 인식이론이라고 하는것은 결국 진리는 알 수 없다고 말해주는 것이 사실. 이것을 그대로 끌고가면 신존재증명도 다 무너진다. 인간의 오류가능성을 인정하고 무한한 진리에 관한 욕망을 버리고 그러면 칸트를 받아들이면...까칠한 삶을 살게 된다..
다음주에 칸트 도덕철학을 설명하고 도덕철학에서 미쳐 다루지 못했던 여러가지 사회적 의식의 형성 이런 부분까지 다루고 나면 왜 칸트 이후의 철학자들이 굳이 system의 철학으로 가려고 했는가를 알 수 있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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