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 에번스: 중세의 그리스도교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12. 12. 13.
중세의 그리스도교 - G. R. 에번스 지음, 이종인 옮김/예경 |
제1장 중세 유럽인들의 눈으로 본 세계
제2장 중세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믿었는가?
제3장 성서의 연구
제4장 교회란 무엇인가?
제5장 평신도
제6장 정치와 교회
제7장 반항 세력
제8장 수도자, 성인, 그리스도인의 모범
제9장 성전
제10장 전통과 연속성: 종교개혁으로 가는 길
10 중세의 '그리스도교 유럽'에서는 하나의 '사회적' 전제가 있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일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중세 사람들은 신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상상조차 못했다. 비록 때로는 미신의 성격을 띠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래도 '대중의' 신앙심은 깊었다. 여기서 '교육받은' 사람들의 신앙에 대한 이해와 당시의 일반 대중이 지닌 '신앙심'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교 '교리'의 사상과 원리는 추상적이고 복잡하다. 그런데 당대의 유럽 주민은 대부분 문맹자였다. 남아 있는 증거물로 볼 때 그들은 성인들을 숭배하는 방식을 통해 예전부터 내려온 이교도적 '신들'에 매달렸다. 이 신들은 토속적이고 친근했으며, 가족이나 친지처럼 느껴질 정도로 위세가 대단치 않은 신들이었다. 의심할 바 없이 대중들은 이런 그리스도교와 이교의 뒤섞임 때문에 종종 정신적인 혼란을 겪었다. 또한 성인들을 신처럼 숭배하는 풍조가 퍼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그리스도인들이 교리를 '실천'했음을 보여주는 사회적 표징들이 있다. 중세에는 거의 모든 아이들이 유아 세례를 받았다. 또한 거의 모두가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갔다. 사람들은 모두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으며 죽어서는 성별(聖別)된 땅에 묻혔다.
30 그리스도가 죽자 그리스도교는 시련을 겪었다. 이는 어느 종교든지 위대한 지도자가 세상을 떠났을 때 생기는 일이다. 그리스도교는 신앙을 체계화하고 저직을 갖추어야 했다. 그렇지 못할 경우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중세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의 '알맹이'를 주로 두 가지 원천으로부터 얻었다. 하나는 성서이고, 다른 하나는 다소 체계적인 일련의 교리들의 종합이다. 초창기 교회는 교리를 종합하는 일에 착수했다. 이 일은 매우 복잡한 과정이었다. 이 과정 속에서 수많은 논쟁이 일어났으며 그 와중에 반대자 및 이단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더불어 정설과 이설, 예배 순서의 배경 신학이 미치는 효과 등을 논하기 위해서 공회의가 빈번하게 열렀다. 이와 더불어 동시대의 철학 및 유대교의 내용을 일부 받아들이거나 차용해 와 다듬는 일도 상당히 많았다.
50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었다. 그는 당ㅇ시의 지배체제가 선호한 잔인한 십자가형을 받았다. 추종자들은 그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났다고 주장했다. 이로 말미암아 예수는 역사 안에서 자리 잡았다. 그의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가 되었고, 그리스도교는 살아 있는 인간, 예수에 대한 믿음을 계속해서 추구했다. 더욱이 예수는 승천한 다음 믿는 자들의 협조자가 될 성령을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 신도들은 의지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인격적 존재를 갖게 되었다(요한 14:16,26). 네 번째 복음서인 요한복음의 예수는 성령을 '보내는 분'이고 성령은 교회에 존재하게 되었다.
55 성서는 처음에 그리스어와 히브리어로 쓰였다. 그런데 중세 시대에 서구의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두 언어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본래 로마제국에는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이렇게 두 개의 '중심'이 있었다. 로마제국의 서반부의 언어는 라틴어였으며 동반부의 언어는 그리스어였다. 따라서 4세기까지 로마의 학식있는 사람들은 그리스어를 배우는 것이 통례였다. 그러나 그런 통례가 점차 사라졌다.
로마제국이 무너지자 침입자 야만족들은 로마의 정치구조를 파괴했고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두 지역간의 교류가 시들해졌다. 6세기에 접어들자 라틴어 사용자들 가운데 다른 언어를 제대로 할 줄 아는 사람은 쉽게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레고리우스 대교황(590-604 재위)이 콘스탄티노플에서 살았지만 그가 그리스어를 알았는지는 확실치 않다. 이처럼 서유럽인들 중 아무리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은 그리스도인이라 하더라도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읽으려면 번역이 필요했다. 이러한 언어 문제는 중세 후기까지 남아 있었다.
구약성서도 히브리어 원전이 아니라 '70인역'이라는 그리스어 번역본으로 읽어야 한다는 문제가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하는 72며의 유대인 번역가가 히브리어 원전을 그리스어로 옮겨서 70인역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한다. 이 번역본은 상당한 기간에 걸친 작업 끝에 2세기 중엽에 완성되었으며 히브리어 원전과 대등한 권위를 가졌다.
히브리에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다는 것은 어느 면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중세 시대 내내 서유럽에서는 유대인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도시와 마을에서 그리스도인들 속에 섞여 살았기 때문이다. 소수의 학자들만이 자기들 고장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찾아가 히브리어 단어의 뜻을 물어보았을 따름이다. 중세 후기에 가서야 히브리어의 정규과정이 생겨났으며 학생들으 비로소 구약성서를 원서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108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리
가장 현저한 중세의 분리는 1054년에 일어났다. 그리스어의 동방교회와 라틴어의 서방교회는 언어의 분리로 오랫동안 소원해진 상태였다. 그 결과 대화를 통ㅇ해 실제로 서로 이해하는 일이 어려웠다. 로마의 주교가 예수에 의해 교회의 '반석'으로 지명된 베드로의 계승자이기 때문에(마태오 16:18) 교회 전체의 수석 대주교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반감이 일고 있었다. 동방교회에는 예루살렘, 안티오크,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 제국의 대주교들이 있었고, 로마의 대주교에 속박되지 않으려 했다. 더군다나 그리스인들은 서방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니케아 신경을 만들어 추가함으로써 초기의 전통으로부터 멀어졌다고 생각했다.추가된 부분은 성령이 성부와 성자 모두에게서 발한다는 '필리오케' 조항이었다. 8세기에 서방교회 그리스도교는 오래된 교회의 믿음을 좀더 명확하게 밝히기 위해서 이 조목을 추가했다. 그 결과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리는 확고해졌다. 교황이 서방교회를 대신하여 사과하려고 2001년에 동방교회를 방문했으나 그 문제는 여전히 반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
144 중세의 사회는 극도로 호전적이었다. 봉건제를 따르는 북부 유럽은 전체 사회체제가 군사계층, 다시말하면 '기사' 계층의 유지에 좌우되었다. 군사계층은 전투가 유일한 직업인 직업군이이나 귀족들로 이루어졌다.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은 도시와 도시 사이에, 혹은 도시국가와 교황 및 황제 사이에 내전을 빈번하게 치렀다. 스페인의 일부 지역은 몇 세기 동안 이슬람교도 침략자들에 의해 점령당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비록 그리스도인들이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고 싶었어도 사회적으로도 실제적으로도 성공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한 가지 방법은 전쟁을 이상화하는 것이었다. 선과 악 사이의 전쟁이라는 개념은 매우 오래된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태동할 무렵에 이 개념을 신봉했던 영지주의자들은 최초의 '이원론자들'로서 그리스도교 입장에서 볼 때 강력한 사상적 도전자들이었다. 이들은 우주에 두 가지의 서로 동일하고 적대적인 권능이 있으며 서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싸움을 벌인다고 생각했다. 이 전쟁에서 악이 이길수도 있었다. 널리 유포된 이 사상에 대항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하나의 신만이 있으며 또 다른 신이 아니라 길을 잘못 든 피조물인 타락한 천사라고 주장했다.
172 오늘날에는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중세의 문화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내세왔던 주장들과 전제조건들 속에 깊이 침잠되어 있었다. 현재 동방교회(그리스 정교회)와 서방교회(로만 가톨릭 교회를 모체로 하는 교회)를 모두 합쳐도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문화적으로 '소수'에 속한다. 다른 종교들의 동일한 공동체 내에서 공개적으로 병존한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동료나 아는 이들에게 항상 손쉽게 그리스도교 신자로 인식되는 것은 아니다. 현대 서양의 사회적 통념에는 그리스도교의 문화적 독재를 보여주는 유산들이 들어 있다. 그러나 이제 서유럽은 더 이상 이론의 여지없는 '지배자'가 아니고, 그래서도 안 된다.
16세기 이래 '알려진 세계'는 점점 확장되었다. 서구 그리스도교 세계는 그때까지 전혀 접촉이 없었던 문명을 '반견하기도 했고'(아메리카 대륙), 또 다른 나라들(동양의 일부)과 무역을 하기도 했고, 또 어떤 지역(아프리카)을 식민정책의 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중세에는 일종의 '세계화'가 있었다. 그것은 현대의 전자 통신을 통한 세계화보다 느렸고 답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세계화가 중세의 '세계'를 변형하고 좀더 크고 다양한 세계로 만들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 세계가 직면한 가장 큰 '시험'은 엄청나게 다양한 문화적 맥락 속에서 과연 번영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교가 중세 천년을 거치면서 중세 사회의 '문화를 통합해' 온 것을 보았다. 하지만 현대에서도 그런 통합을 이루어내겠는가 하는 것은 별개의 이야기이다.
46-62 사도 바울로 전도여행을 시작하다. 새로운 지방교회들이 증대하다.
4세기까지 교회가 만들고 공인한 신약성서가 집필되다. 도나투스주의가 북아프리카에서 교회 분리를 일으키다.
324 니케아 공의회가 아리스우파를 이단으로 단죄하고 니케아 신경을 만들다; 1차 세계 교회 공의회.
337 최초의 그리스도인 황제인 콘스탄티노플 대제가 죽다.
354-430 히포의 아우구티누스가 활동하다.
381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니케아 신경을 승인하다; 2차 세계교회 공의회.
5세기 성 패트릭이 아일랜드를 개종시키다.
431 에페소스 공의회; 3차 세계교회 공의회
480년경-550년경 누르시아의 베네딕투스, 베네딕투스 교단의 창시자
451 칼케돈 공의회. 동방의 비칼케돈 교회가 분리됨; 4차 세계교회 공의회.
553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5차 세계교회 공의회.
596 교황 그레고리우스 대제가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를 파견해 영국을 개종시키다.
787 니케아 공의회에서 우상파괴논쟁을 종식하고 성상을 회복할 것을 모색하다.
962 이토스 산에 최초의 수도원이 건립되다.
1033-1109 베크 수도원의 안셀무스와 캔터베리의 안셀무스
1054 그리스 정교회와 로마 교회가 교황의 지위와 니케아 신경의 '필리오케' 조목에 대한 이견으로 분리되다.
1090-1153 시토 교단의 위대한 지도자 크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
1096 1차 십자군.
12세기 유명한 체제반대파와 이원론이단들이 프랑스와 스페인 북부에서 번성하다.
1204 4차 십자군으로 주요 십자군 원정시대가 종료되다
1215 4차 라테란 공의회. 고해제도의 좀더 공식적인 요건을 만들다.
13세기 프란체스코 수도회와 도미니크 교단 등의 탁발 수도자 교단들이 번창하고 새로 생긴 대학들의 학사 일정을 결정하다.
1274 토마스 아퀴나스가 죽다.
1309-1377 교황의 아비뇽 유수.
1378-1417 서방교회의 교황직의 대분리.
1384 존 위클리프가 죽다.
1414-1418 콘스탄츠 공의회가 위클리프와 얀 후스를 이단이라고 단죄하다.
1438-1445 피렌체 공의회가 1054년의 대분열을 종식시키려고 모색하다.
1483 마르틴 루터가 태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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